[History Culture Ⅱ] 미래와의 근접조우, 그 여정의 위대한 안내자들
[History Culture Ⅱ] 미래와의 근접조우, 그 여정의 위대한 안내자들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6.26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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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대중문화 등 사회 곳곳에 영향 끼친 SF의 ‘빅3’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History Culture Ⅱ] 영미 SF 3대 거장



미래와의 근접조우, 그 여정의 위대한 안내자들

과학사, 대중문화 등 사회 곳곳에 영향 끼친 SF의 ‘빅3’




보통 공상과학소설로 번역되는 SF(science fiction). 본격적인 SF의 등장은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한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H.G 웰즈의 <타임머신> 등은 근대 SF의 기초를 세운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영미권에서는 판타지 소설과 함께 진작부터 주류 문학으로 자리 잡은 SF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작품의 양과 질 모두를 충족시키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은 영미 SF의 3대 거장이라 불리며 과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아서 C. 클라크, 도리스 레싱 등 수많은 작가에 영향 끼쳐

▲노년의 아서 C. 클라크
   아서 C. 클라크(Athur C. Clarke, 1917.12.16.~2008.3.19.)는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꼐 영미 SF문학계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SF작가다. 대표작으로는 <2011 스페이스 오디세이>, <유년기의 끝>, <라마와의 랑데부>, 그리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쓴 단편을 모은 <아서 C. 클라크 단편 전집>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통신위성’과 ‘인터넷’, ‘우주정거장’, ‘핵발전 우주선’, 'MP3‘ 등의 단초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현대 과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미래학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체 관측을 최미로 삼았고, SF를 열독했다. 16살이 되던 1934년부터 영국 행성간 협회(British Interplanetary Society)에 입회해서 활동하기 시작, 1946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아서 C. 클라크는 1937년부터 과학 소설 잡지에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후 1999년까지 일생동안 무려 100여 편이 넘는 SF를 꾸준히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영국 공군에 하사로 임관해 레이더에 의한 조기 경계 시스템 구축 등에 참여했던 그는 이후 대위로 전역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게 된다. 1945년에는 통신위성에 관한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작성해 처음 세상에 발표, 현재 전 세계 통신망의 중요 수단이 된 통신위성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후 주로 우주 비행에 대한 소설과 에세이를 출판했는데, 1968년에는 장편소설  <201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발표해 놀라운 우주 세계를 묘사했다. 이 소설 속에서는 우주선을 회전시켜 가짜 중력을 만드는 장면이 있는데, 이 기술은 현재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작품은 거장 스탠리 큐브릭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서 C. 클라크는 미항공우주국(NASA)와도 밀접한 연을 맺고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는데, 달 착륙 당시 우주인 닐 암스트롱은 “아서 C. 클라크가 이 우주시대를 열었다”며 격찬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다른 SF 작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지나치게 엄밀한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집필되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그는 과학적 사실보다는 인간에 대한 탐구에 더 중점을 두게 된 현대  SF 작가들과 비교 되어 평가절하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작품들이 2007년 노벨상 수상자였던 도리스 레싱을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친 점과 SF문학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살아생전 외계인이 있다는 확실한 흔적을 보고 싶다던 아서 C. 클라크는 2008년 3월 19일 오전 1시 30분, 스리랑카 자택에서 심부전으로 쓰러져 향년 90세를 일기로 자신이 그리던 우주로의 끝없는 여행을 떠났다.




로버트 A. 하인라인, 그랜드 마스터 상을 수상한 첫 번째 SF 작가

  또 한명의 영미 SF문학계의 ‘빅3’인 로버트 A.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 1907.7.7.~ 1988.5.8)은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클라크처럼 장수를 누리며 엄청난 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에는 하인리히의 전작 중 제한된 수의 작품만 번역 소개되었으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인 <스타쉽 트루퍼스>와 같은 굵직한 작품을 통해 국내에도 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과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군인으로서의 경력이다. 일찌감치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해 1929년 해국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931년에는 항공모함 USS 렉싱턴 호에서 무선 통신 장교로 복무했다. 1934년에 폐결핵으로 제대한 하인라인은UCLA에서 수학과 물리학 수업을 들었으나 건강사의 이유 등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부  동산 중개업과 은광 사업, 그리고 정치에도 뛰어 들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다. 해군에서 나오는 연금만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느낀 하인라인은 1939년 생애 처음 쓴 SF 단편 ‘생명선’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의 한 장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해군의 항공 공학 관련 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고고도 압력복과 레이더 연구가 주요 연구 분야였는데 <스타쉽 트루퍼스>의 파워드 슈트를 비롯한 작품 속의 세밀하고 전문적인 무기와 기계관련 묘사가 가능했던 것은 이런 경력 덕이다. 그리고 그는 해군 군수공장에 동료 SF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민간 연구자로 영입한다. 아시모프는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에서 ‘원고는 한 번에 써내려 가고 퇴고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하인리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곤충형 외계생물과 인류와의 전쟁을 다룬 <스타쉽 트루퍼스>(1959)는 우선 과학적이고 강력한 무기들로 밀리터리 SF 팬들을 매료시켰다.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군대 급으로 끌여올려주는 강화복 ‘파워드 슈트’는 ‘외골격 전투복’이라는 형태로 미 육군에서 연구 개발 중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 <아이언맨>의 슈트나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측 전투복도 모두 파워드 슈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 게임 <스타크래프트>는 그 슈트뿐만 아니라 곤충형 외계종족(저그)과 전쟁을 벌인다는 콘셉트까지 그 기원을 <스타쉽 트루퍼스>에 두고 있다. 게임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제작자 명단에 하인리히의 이름을 올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SF작가로 활동하면서 하인라인은 SF를 넘어서 과학사, 대중문화 등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쳤다. 그이 작품이 1940년 후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라는 주류매체에 주류 매체에 실렸던 것부터 그는 예외적인 작가였다. 그의 작품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 등장한 문장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의 앞 글자를 딴 ‘탄스타플(TANSTAFL)'이나 <낯선 땅 낱선 이방인>에서 ’공감‘ 및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그록(Grok)'을  비롯해 무선조종 물체를 의미하는 ‘왈도(Waldo)' 등은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였다. 소련과의 우주개발경쟁에 참여한 많은 미국엔지니어들은 어린 시절 하인리히의 청소년 SF를 보고 자란 이들이었다.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중계방송에 초대된 하인라인은 ’인류 역사상 자장 위대한 순간‘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밖에도 하인라인이 미국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미 수많은 작품으로 SF 최고 권위의 휴고상을 수차례 수상한 하인라인은 1970년대 초반, 복막염으로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SF 창작에 복귀한 하인라인은 68세가 되던 1974년 그랜드 마스터상을 수상한다. 하인리히는 미국 SF, 판타지 작가 중 뚜렷한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인  였다.(아서 C. 클라크는 1986년, 아이작 아시모프는 1987년 수상)

  1990년 9월 14일에 팔로마 천문대를 통해 발견된 소행성대는 그의 이름을 다서 ‘312 Robheinlein'으로 명명됐다. 1994년에는 화성의 한 분화구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석양 너머 서쪽 하늘 별들이 목욕하는 그 곳, 우주에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자신의 평생 업적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새겨진 보좌에 앉아 있는 아이작 아시모프. 로웨나 A. 모릴의 그림. <출처: Rowena Morrill at en.wikipedia.org>


아이작 아시모프, 그가 쓰면 모든 것이 SF가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2.~1992.4.6.)는 벨라루스와의 국경 지대에 있는 러시아 스몰렌스크 지방의 페트로비치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인 1923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피해서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부모는 브루클린에서 편의점(캔디 스토어)을 운영해서 제법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중학생이었던 11세 때에 아시모프는 처음으로 창작을 시도했다. SF까지는 아니고 자기가 읽은 청소년 소설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의 내용을 거의 베끼다시피 한 미완성 작이었다. 물론 작가가 되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당시 상당수의 유대계 이민자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부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의과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935년에 아시모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스 로 주니어 칼리지를 거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지만, 동물 해부 실습 과정에서 혐오감을 느끼고 전공을 생물에서 화학으로 변경했다.

  대학생이 된 아시모프는 취미였던 SF 읽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소설 습작에 돌입한다. 마침 아시모프가 애독하던 SF 잡지 <어스타운딩 스토리즈>가 1937년에 새로운 편집장 존 W. 캠벨 2세를 맞이하며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으로 이름을 바꾸고 보다 차별화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마음에 들어 한 아시모프는 매호 수록된 소설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상을 적어서 잡지사에 투고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독자 대 편집자의 관계로 캠벨과 친분을 맺게 된다. 1939년에 아시모프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석연찮은 이유(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일종의 반유대주의)로 의과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낙담한다. 대신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전공인 화학으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밟는다. 그런 와중에도 SF를 계속해서 기고함으로써 아시모프는 점차 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41년에는 유명한 중편 <전설의 밤(나이트폴)>을 발표해서 격찬을 받고, 명실상부한 SF 분야의 대표 작가로 부상했다. <파운데이션>과 <로봇>시리즈를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파운데이션 시리즈’에 나오는 ‘심리역사학’(psychohistory) 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된 신조어이다. 원래 그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힌트를 얻어서, 은하제국의 쇠퇴와 부흥을 묘사한 중편 분량의 소설을 써보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캠벨의 제안에 따라 시리즈로 늘어났으며, 단행본으로는 <파운데이션>(1951), <파운데이션과 제국>(1952), <제2파운데이션>(1953)을 시작으로 해서, 무려 40여 년 뒤인 1992년에야 모두 7권으로 완간되었다

  아시모프의 소설은 <스타워즈>(1974)와 <스타트렉>(1966-1969)을 비롯한 수많은 SF 영화와 드라마에 영향을 주었다. 영화화된 그의 작품은 <바이센테니얼 맨(2백세가 된 남자)>(1999)과 <아이 로봇(나, 로봇)>(2004)이 대표적이다. 우디 앨런은 <슬리퍼>(1973)를 만들면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제3종 근접조우>(1977)를 만들면서 아시모프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시모프에게도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말부터 20여 년간은 SF 분야에서 사실상 침묵을 지키며, 이미 유행이 바뀌어서 자신은 더 이상 SF를 쓸 수 없다고 자책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한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격려를 받는다. “아시모프, (...) 당신이 쓰면 그게 바로 SF예요.” 이 조언에 감명을 받은 아시모프는 이후로 글을 쓸 때마다 자신감을 얻기 위해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아이작, 네가 쓰면 그게 바로 SF야.”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아시모프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1992년 4월 6일, 아시모프는 72세를 일기로 뉴욕 시의 자택에서 심장과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야 그의 진짜 사인은 1980년대 초에 받은 수술 당시에 수혈로 감염된 HIV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합병증이었음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죽음도 우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아시모프는 친구인 하인라인의 사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후에도 책이 한 권 출판되었으며, 생전에 쓴 소설들도 재판 작업 중에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는 아시모프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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