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II] 모더니즘의 대전환기
[History Culture III] 모더니즘의 대전환기
  • 방성호 기자
  • 승인 2014.05.22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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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이동,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슈메이커=방성호 기자]

[History Culture III] 새로운 미술의 탄생   



모더니즘의 대전환기 


미술의 이동, 유럽에서 미국으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하고 유럽은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반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은 대량학살과 파괴의 물적·정신적 폐허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단연 선두에 있었으나, 짧은 역사와 전통으로 인해 정신적인 가치 즉,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유럽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자명했다. 

  따라서 미국은 세계의 리더로서 유럽보다 더 나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전통을 세우고자 독자적인 ‘문화 융성 계획’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서양미술의 큰 패러다임 역시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며 미술은 또 다른 신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 동쪽에 위치한 현대 미술관이며,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그리고 현대미술을 전시한다.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의해 완공된 이 박물관은 달팽이처럼 건물 자체가 나선형으로 내려오게 되어있으며, 20세기의 중요한 건축물중 하나로 꼽힌다.




   

전통과의 단절에서 태어난 새로운 미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열등의식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독자적인 가치를 수립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경제발전에 힘입어 중산층이 확대되고, 교육의 수준이 높아지며,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어 개인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살기 좋은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철학이나 문화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미국인들의 생각은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만이 갖는 특별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실천으로 옮겨졌다.

 

  미국인들의 혈통은 유럽에 두고 있었지만, 그들의 철학과 문화예술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미국인들이 역사, 철학, 문화예술 등 모든 물적·정신적 측면에서 그들만의 독자적인 가치를 세우는데 있어 가장 우선시한 것은 기존 유럽에서 행해졌던 모든 전통과의 단절이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미국만의 새로운 전통과 가치를 수립하기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인 정부 주도하의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무한히 허용된 광활한 자유의 공간에서 풍부한 물자를 사용하는 새로운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회적 평가를 통해 가치를 부여하며,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미국 미술의 새로운 전통, 독자성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 연방정부, 기업가와 미술을 애호하는 재산가들이 적극적으로 미술가들의 활동을 후원하며 미술인들의 자존감과 창작 의지를 고양시켰다. 정치적으로 뇌물의 수단이나 탈세의 수단으로서 미술작품을 수집·보관하는 저급한 차원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신적 가치를 함양하기 위해 정·재계가 힘을 모은 국가차원에서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미술의 형태이다. 두 차례의 전쟁의 소용돌이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피해 유럽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온 미술가들과 미국 출신의 작가들이 함께 창안한 새로운 표현은 소위 ‘뉴욕파’라 불리는 화가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다. 이 시기에 뉴욕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예술가뿐 아니라, 화상, 비평가, 문인들과 미국 내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하며, 예술에 대한 서로의 주장에 대해 귀 기울이며 강한 유대를 형성하고, 새롭고 다양한 형식의 미술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문화적 배경이나 작품 제작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었으며, 이들을 통틀어 뉴욕파(New York School)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뉴욕파들은 미국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개척자이자 주역이 되었으며 미국 현대미술의 전통을 수립한 미술가들이었다. 





독자적 미술의 탄생배경


  휘트니미술관에서 발행한 「The American Century - 현대미술과 문화」에서는 독자적인 미국미술이 탄생할 수 있었던 뉴욕파를 형성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미국연방정부의 대공황기에 미술가를 공식적인 직업으로 인정하고 실업상태에 있는 미술가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시행한 뉴딜 공공사업 진흥국(WPA, Work Progress Administration)의 ‘연방미술프로젝트(FAP, Federal Art Project)’가 있었다. ‘연방미술프로젝트’는 실제적인 실업상태에 있는 미술가들을 모집해 1935년부터 1943년까지 미국 전역에 20만개의 공공미술품을 제작, 설치할 수 있도록 지원한 프로젝트였다.    


  둘째, 독일 표현주의 화가인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1880~1966)은 1915년 뮌헨에 미술학교를 세우고 미술교육을 시행했던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다. 나치의 학정을 피해 1932년대 미국으로 이주,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뉴욕의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를 세웠다. 그의 입체파의 구조와 공간, 독일 표현주의와 야수파의 감성을 결합시킨 미술교육은 잭슨 폴록 등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한스 호프만과 마찬가지로 페르낭 레제, 피에트 몬드리안, 마르크 샤갈, 발터 그로피우스 등 추상 미술가들과,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등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이 동시대에 뉴욕에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뉴욕은 미국정부의 지원 아래 경제적 안정 속에서 유럽의 이성적인 추상 화가들과 감성적인 성향의 초현실주의자들이 교류하며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탄생시킬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현대미술의 시작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은 미국의 평론가 알프레드 바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작품에 대해 “형식은 추상적이지만 내용은 표현적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 후 1945년 「뉴욕커」지의 기자이자 비평가였던 로버트 고츠가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의 작품에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미국 추상 회화 조각전」이라는 전시에 출품된 1940년 후반에 등장한 추상회화 작가들의 개별적인 양식을 총칭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은 각각의 미술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통일된 경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자연이나 어떤 대상의 재현이 아닌 작가의 내면세계를 중시하며 추상 형태나 무의식의 상태에서 발생한 우연한 결과를 존중하며 그에 대한 미학적 의미를 부여한 미술이다. 작가 자신의 직관적인 표현의 행위 그 자체를 예술로 주장하며 무의식을 드러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오토마티즘(자동기술, automatism)을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뉴욕파라고 불리는 화가들은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과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마티스의 원시적인 색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에 의한 자동기술이라는 표현기법을 혼합해 ‘추상표현주의(abstraction expressionism)’라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탄생시키면서 유럽 미술의 전통에서 벗어나 미국적인 미술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즉, 서구 근대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파,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여서 만들어낸 미술이 바로 추상표현주의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서양미술사에 등장한 다양한 경향을 융합해 유럽 미술에 대한 예속성을 단절하고, 미국 현대미술의 독자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추상표현주의를 현대미술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키며 뉴욕을 유럽과 양립하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들기에 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바넷 뉴먼의 색채추상




추상표현주의의 특징과 해석  


  추상표현주의는 작품 자체의 시각적 특성에 따라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과 색채추상(Chromatic Abstraction 또는 Color Field)으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의 그림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시각적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의 작업에는 몇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이젤을 벗어났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젤(화가가 마주 보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화판을 세워 놓을 수 있는 도구)을 사용했는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이젤을 사용하지 않고 글씨를 쓰는 것처럼 바닥에 화판(캔버스)을 눕혀놓고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수공예적인 묘사에 의존하는 작업이 아니라 화가의 다양한 신체 부위를 사용하게 된 것을 의미하며, 붓이나 연필 등 전통적인 그리기 도구의 사용뿐 아니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둘째, 대상성에서 탈피했다. 기존의 대상을 묘사, 재현함으로써 나타나는 사실적인 이미지를 철저히 제거하고 오직 작가의 활동은 흔적이나 안료의 특성이 평면 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 오직 점·선·면·색 등의 조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화면을 창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의 본질적인 모습이나 그 의미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그들 자신과 그 행위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어떠한 기억, 연상, 전설, 신화 등 과거가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실존주의에 귀속시키고 있다. 


  셋째, 작품의 크기가 대형화되었다. 소재(묘사대상)이 없어진 화면은 예술가들의 예술행위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크기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적 이유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광활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에 압도당하지 않고 역동적이고 과감한 행위로써 자연과 공존·대립하며 예술과 관객을 사로잡아 작품 속에 머물게 하려는 외적인 의도도 있었다. 거대한 화면 앞에 서면 마치 광활하고 웅장한 자연을 대하는 것과 같은 숭고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예술행위가 실행되는 창조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거대한 화면을 좋아했고 그 화면은 관객에게 마치 또 다른 자연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넷째, 예술가와 작품의 실존적 합일(合一)을 추구했다. 당대 액션페인팅의 선두주자 잭슨 폴록은 “나는 내가 그림 안에 있는 동안(작품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작업은 거대한 화폭의 주변 또는 그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감을 붓고, 흘리고, 떨어뜨리고, 뿌리고, 굵은 선으로 휘갈겨 긋거나 화면을 온통 같은 색으로 칠해버리는 등의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예술가의 무의식의 세계가 즉흥적인 감흥을 창작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고, 그 독특한 결과물이 바로 추상표현주의 작품이다.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속에서 작가의 실존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제작행위 또는 작품과 작가 자신이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는 경험을 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창작행위나 그 결과물은 바로 예술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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