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II] 전근대 문학의 아웃사이더, 사드(Sade)
[History Culture III] 전근대 문학의 아웃사이더, 사드(Sade)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04.28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문학사 속 어두운 편의 하늘을 채운 사드 후작

관습과 인습에 대한 타파 혹은 변태적 성욕의 표출




어떤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상징적 이미지’로서의 명칭이라면 더욱 그렇다. 로마의 제정 시대를 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황제를 상징하는 시저(Caesar)와 7월 ‘July’로 그 흔적이 남아있고,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정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플라토닉 러브’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악명(惡名)’으로 남는다면 어떨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돈키호테’가 르네상스 시대를 닫고 고전주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그의 소설들은 고전주의 시대를 닫고 현대성의 시대를 열어놓았다”고 말했다. 비록 동시대에서는, 그리고 그 이후로도 150여 년 동안 헐뜯음을 당해 오며 금기시 됐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20세기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바로 ‘사드 후작’이다.



실존주의, 초현실주의의 창시자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로 정의되는 ‘사디즘(Sadism)’은 오스트리아 학자인 크라프트에빙이 사드의 소설이나 삶에서 전형적으로 표현한 성행동을 관련시켜 명명한 것이다. 흔히 ‘가학적 음란증’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사디즘’은 사드의 이름을 변태성욕자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재평가된 사드의 사상과 문학은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 철학, 정치학, 그리고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흔히 ‘사드 후작’이라고 지칭되는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는 프로방스 지방의 어엿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드는 10세에 루이 드 그랑 중등학교에 입학해 4년간 공부했고, 이후 기병대에 입대하여 7년 전쟁을 경험하고 가문의 입김으로 대위까지 승진한다. 파리로 돌아온 사드는 10대 후반부터 일찌감치 노름꾼 겸 난봉꾼으로 악명을 날리다가, 1763년에 중매로 파리 조세재판소 사법관의 딸 르네 펠라지 드 몽트뢰이와 결혼한다. 1767년 부친이 사망하자 ‘후작위’를 물려받은 사드는 가문의 재산을 유흥비로 탕진해버린다.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방탕한 생활을 지속한 사드는 종종 유흥가를 방문해 매춘부와 어울리며,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통한 쾌락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수차례 체포되고 수배되었으나 귀족 가문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국왕의 사면을 얻었다. 하지만 단순한 풍기문란이나 신성모독 혐의를 넘어서서, 그에게 심각한 신체적 위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피해자들이 등장하며 파문이 일었다. 1768년 ‘아르퀴에유의 거지여자 구타사건’과 1772년 ‘마르세유의 봉봉사건’ 등의 스캔들을 일으켜 결국 그는 감옥신세를 지게 된다. 이 사건들은 채찍질을 하거나 몸에 칼로 상처를 내고 뜨거운 밀랍을 붓는 등의 행위와 마약 성분의 최음제 사용 등으로 후에 그의 ‘가학적 성애’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사드는 1774년부터 본인 영지의 라코스트 성에서 부인과 함께 칩거하지만, 미성년자 시종들과의 스캔들로 결국 1777년 무기한 수감된다. 사드는 이때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수감생활 중 완성한 사드의 문학 세계

  사드는 생애의 1/3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고 1/5를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곡 및 소설 창작과 서한 작성에 바쳤고, 1784년 초에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감되어서도 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일설에 따르면 감옥에서 쓴 몇 개의 소설을 익명으로 외부에 발표하기도 했던 그는 ‘풍속소설 작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막이 오른다. 당시 샤랑통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사드 후작은 혁명으로 왕명이 폐지되자 1790년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다. 

  이미 수차례의 수감생활과 아내와의 이혼으로 가산을 탕진한 사드는 ‘연극’에 관심을 가졌으나 상영되진 못했고,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1791)’을 익명으로 발간하나 악평만을 얻게 된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신앙이 깊고 정숙한 미덕의 화신이지만 불행한 일생을 보낸 쥐스틴과 악덕에 몸을 바쳐 부귀영화를 누린 악랄하고 음탕한 큰 딸 쥘리에트, 이 두 자매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소설은 쥐스틴에게 잇따라 가해지는 가혹한 처사, 그 중에서도 생 마리 수도원에서의 수도사의 기학적 행위의 묘사 등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드는 귀족 신분이라는 약점을 숨기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1793년 말에 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체포된다. 이듬해에 다시 석방된 사드는 생계를 위해 집필에 전념하여 주요 대표작들을 실명, 또는 익명으로 펴낸다. 그러나 나폴레옹 치하인 1801년 초, 사드는 결국 음란물 유포죄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804년에는 감옥 떠나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오게 된다. 이때 사드의 원고 중에 일부가 경찰에 압수되는 과정에서 잿더미로 변하기도 했다. 평소 연극에 몰두했던 사드는 샤랑통에서 환자들을 데리고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 공연을 개최하기도 한다. 이는 훗날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와 사드(1963)’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결국 1814년, 사드는 샤랑통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는다. 



탈규범적 행위에서 쾌감을 얻다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사드는 유언장에서 자기 무덤 위에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서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가 썼던 작품들과 그의 ‘가학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쥐스틴’과 ‘쥘리에르 또는 악덕의 변헝’과 그의 사후, 20세기 들어와 발견되어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미완성작 ‘소돔 : 120일’ 등 그의 작품들은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며 비뚤어진 ‘성애’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초에 번역·출간됐다가 이내 판매금지된 이 소설은 성애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의 끝을 보여준다. 흔히 성도착이라고 알려진 탈규범적 성행위의 총목록이라 할만한 ‘소돔 120일’은 ‘37일 만에 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 혁명 때 분실됐다가 1904년에 1904년에 발견됐다. 제1부와 2~4부의 줄거리 요약으로 간행된 ‘소돔 120일’은 4명의 권력자가 젊은 남녀노예 수십 명을 이끌고 120일 동안 벌이는 온갖 변태적인 향락의 기록이다. 

  엽기적인 행위들이 묘사되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이 책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타락한 인간, 지배계급의 포악성 들을 표현한 에로티시즘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서구 고전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들은 사드가 성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악(惡)의 문제를 그 뿌리까지 탐색했다고 평가했다. 시인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사드는 “이전에 존재했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었다. 잔혹과 향락을 동일한 감각으로 봤던 보들레르도 사드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사드가 살았던 당시의 프랑스는 혁명을 통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온갖 부작용과 사회 체제에 대한 실험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시민애를 외치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유럽역사에서 처음으로 인간과 사회의 미래에 대한 시선이 장밋빛이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드는 계몽주의의 낙관적인 인간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고, 잔인하며. 공격적이고,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계몽주의자들의 원칙에 기초한다. 첫 번째는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은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이러한 철학이 금기와 인습, 권위에 대한 과격한 파괴의 형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가 후대 문학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거대하다. 낭만주의 이후 초현실주의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라마르띤느, 발자쿠, 플로베르, 아뽈리네르, 바따이유 등 숱한 문인들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그가 갖고 있었던 쾌락의 개념은 사디즘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 때문에 상대방이 드러내는 공포를 보면서 쾌락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금기와 인습에 대한 전복과 도전이 후대에 그를 재평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8길 11, 321호 (여의도동, 대영빌딩)
  • 대표전화 : 02-782-8848 / 02-2276-1141
  • 팩스 : 02-2276-111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손보승
  • 법인명 : 이슈메이커
  • 제호 : 이슈메이커
  • 간별 : 주간
  • 등록번호 : 서울 다 10611
  • 등록일 : 2011-07-07
  • 발행일 : 2011-09-27
  • 발행인 : 이종철
  • 편집인 : 이종철
  • 인쇄인 : 신진민
  • 이슈메이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이슈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dsoft.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