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Ⅱ] 위대한 단독자, 장 자크 루소
[History Culture Ⅱ] 위대한 단독자, 장 자크 루소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4.2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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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History Culture Ⅱ] 위대한 단독자, 장 자크 루소


중세의 질서와 관념을 거스른 루소, 내향성의 세계에서 ‘나’를 마주하다

평생 자유와 평등 추구…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 만들어 


나폴레옹은 루소의 묘지 앞에서 우리 둘 중 누구 한 사람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세상은 보다 조용해졌을 거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만큼 루소의 사상은 그의 생전에도, 또 사후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중세적 봉건 질서하의 사회와의 불협화음으로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지만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고 에너지를 불어넣었으며 또 그 방향을 제시했다.




축복받지 못한 삶, 그리고 바랑 부인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그는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루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출생은 그의 첫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루소를 낳고 열흘 뒤에 사망했고 시계공이었던 아버지 이자크 루소(Issac Rousseau) 또한 그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그는 10살에 삼촌에게 맡겨져 자랐다. 외삼촌은 루소를 다시 당시 농촌이었던 보세지역의 랑베르시에라는 목사의 집으로 보냈고, 이후 루소는 이 집에서 2년 동안자신의 사촌과 함께 자라며 라틴어와 수학 같은 기본적인 학문을 접한다. 그리고 이것이 루소가 배운 공부의 전부였다. 루소는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도제가 되어 시계금속 가공기술을 배운다. 폭언과 폭력 속에서 살아야 했던, 루소의 생애 중 가장 불행한 3년이었다. 

  1728년의 어느 날, 성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온 루소는 뜻밖의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늦게 돌아온 바람에 성문이 닫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게기로 그는 제네바보다 큰 세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루소는 그 길로 프랑스로 떠난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프랑스 안시에서 루소는 평생의 연인이자 보호자이면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바랑 부인을 만난다. 프랑스 내에선 유명한 관광지인 호반의 도시 안시, 그 곳에서 루소가 바랑부인을 처음 만난 장소에는 지금도 루소와 바랑부인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있다. 루소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만남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새겨질 만큼 바랑부인은 루소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루소는 평범한 하인으로 일생을 보냈거나 길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29세가 되는 해에 성공을 위해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루소는 바랑 부인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고 사람들을 만났으며, 책을 읽고 공부했다.





성공을 위해 파리로

  바랑 부인의 품을 떠난 루소는 1941년 가을,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1792년 도망치듯 파리를 떠날 때가지 20여 년간을 그곳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파리의 호텔에 틀어 박혀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던 루소는, 1749년 디종 아카데미가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인간의 도덕심을 타락시켰는가, 발전시켰는가’라는 주제로 주최한 공개 논문 심사에서 일등을 차지함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당시 루소는 계몽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개진했다. 과학과 예술이 인간의 도덕심을 타락시켰다고 결론짓는 논문을 써서 보낸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는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였는데, 문명의 발전으로 오늘날과 같이 타락한 사회로 변했다는 게 이 논문의 요지였다.

 논문은 이후 책으로 출판되었고 루소는 일약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루소가 작가가 된 일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책에서 말한 대로 도덕적으로 고결하게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칼과 시계도 팔아 버렸다.

  루소의 성공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기보법(음의 고저와 장단을 표시해 음악을 기록하는 방법)을 과학 아카데미 협회에서 발표했고, 그의 오페라 <마을의 아첨쟁이>는 1972년, 왕이 보는 가운데 왕궁에서 공연되었으며 파리에서도 공연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루소의 오페라에 흠뻑 빠진 왕이 면담을 청했을 때 그는 가지 않았다. 디드로를 비롯한 루소의 친구들이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차 버렸다고 루소를 비난했지만 루소는 눈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왕은 나중에 루소에게 돈을 보냈다. 사실 이미 그때의 루소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도덕적으로 청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만일 루소가 왕의 연금을 받고 안락한 생활에 빠져 들었다면 루소의 역작 <사회계약론>도 <고백록>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파리의 살롱에서 명성을 추구하고 여자들을 좆던 루소의 친구들은 루소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1754),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1756),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1758), <쥘리, 또는 신 에로이즈>(1760), <사회계약론>(1762), <에밀>(1762) 등을 잇따라 출간하며 유럽을 뒤흔드는 최대의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철저히 고립되어 자신을 마주하다

  1762년은 루소의 삶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출간된 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책으로 루소는 유럽을 뒤흔드는 지식인이 되었지만 아직 부르주아적 질서가 승리를 거두지 못한 18세기 루소의 주장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루소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는 루소를 수용하지 않았다. <에밀>은 발행 금지되었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루소는 스위스로 도피했지만 제네바에서도 베른에서도 <에밀>을 쓴 루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소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축출되었다. <에밀>은 기독교인들의 불편하게 만들었고, <사회계약론>은 권력을 쥐고 있던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세질서의 양 날개로부터 모두 위협을 받은 루소는 이후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사방이 적들이 루소를 괴물인 양 옥죄어 오고 있는 상황에서 루소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남겼다. 하나는 지금 “내 곁에는 형제도, 이웃도, 그리고 사귀는 사람도 없이 오직 나만 지상 위에 홀로 있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사교적이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내가 모두에 의해 만장일치로 추장당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며, 또 다른 책은 <고백록>이다.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된 존재가 된 사상가 루소는, ‘자신을 향한 길’을 선택한다. 권력을 지닌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그를 내침으로 해서 그를 은둔형 외톨이 같은 존재로 가둬두고 싶었겠지만, 루소는 스스로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표현했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가지 예가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을 시도해보려 한다. 나 같은 사람들 앞에 한 사람의 인간을  완전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 인간은 바로 나다. - <고백록>


  사회로부터 고립된 루소는 외적 투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내향성의 길을 선택했다. 그 내향성의 세계에서 루소는 때로 위대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와 마주했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서도 집단과 거리를 두고 홀로서기를 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루소는 망명 중 스위스의 비엔느 호수에 있는 생 피에르 섬에서 두 달 간 머문 적이 있는데,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그가 죽기 직전 그 당시의 생 피에르 섬에서의 사유를 역어 낸 책이다. 루소는 그 섬에 보냈던 두 달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기록한다. 그 섬은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쾌적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좋은 위치”에 있다. 그 섬에서 루소는 자기관계의 밀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삶을 꾸려 나갔다. <고독한 산책가의 몽상>을 보면 그가 당대에 이미 실존철학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의 깊이와 스타일은 니체, 사르트르, 카뮈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중세를 거스른 사상가, 프랑스의 신이 되다

  망명 기간 동안 스위스 각지와 영국을 떠돌던 루소는 다시 프랑스로 가서 노르망디, 그레노믈, 보르고앙 등을 전전하다 1770년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에 돌아와서도 그이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길에서 팸플릿을 돌리기도 했고,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였다. 1778년 7월 2일 아침, 그는 발작을 일으켜 침대에서 떨어졌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죽음을 맞았다. 그의 데스마스크는 제네바 대학 인문학과 도서관의 루소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루소는 사후에도 보수 세력의 박해를 받았다. 그의 사상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794년 프랑스혁명 정부는 루소를 팡테옹에 모셨다. 루소가 없었다면 자유와 평등을 위해 일어선 프랑스혁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팡테옹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영묘이자 프랑스를 지키는 신을 모시는 곳이다. 축복 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루소는 볼테르, 빅토르 위고, 디드로 ,에밀 졸라 등과 함께 프랑스의 신이 되었다.

  루소의 글은 후세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은 루소의 <에밀>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칸트의 <판단력비판> 또한 알프스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한 루소의 묘사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열렬한 루소 추종자였던 톨스토이는 루소의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 없이는 <안나 카레리나>도, <전쟁과 평화>도나올 수 없었다. 톨스토이의 <고백록> 또한 루소의 <고백록>과 그 문제의식을 함께 한다. 20세기 최후의 위대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루소의 <언어 기원론> 분석으로 자신의 해체철학을 시작했다. 루소에 대한 연구서 또한 산을 이룰 만큼 많다. 루소의 책만큼 철저히 분석되고 인용된 책이 있다면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책 정도일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치학과 철학은 물론, 문학과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자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루소를 파헤쳤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에 사슬로 묶여 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에밀>을 통해 사람을 만드는 진정한 교육의 방향을, 그리고 <고백록>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통해 위대한 고독의 가치를 부르짖었던 루소.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의 모색을 위한 귀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김의기(2014), <나는 루소를 읽는다>, 다른 세상
노명우(2014),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사월의 책
장 자크 루소(2007), 홍승오 옮김, <고백록>, 동서문화사



사진 캡션
서브 01 / 루소의 초상화
서브 02 /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 기원론>에 나타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사진의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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