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MBC 스포츠 플러스 현주엽 농구 해설위원
[단독 인터뷰] MBC 스포츠 플러스 현주엽 농구 해설위원
  • 김갑찬 기자
  • 승인 2016.03.02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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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갑찬 기자]


 

대한민국 농구 레전드, 대중 속으로 다가오다

잠시 떠나있었던 농구 코트, 이제는 농구계 발전을 위해 힘쓸 것


 

 

 

최근 스포테이너(스포츠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그라운드와 코트 위에서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던 스포츠 스타들의 모습을 TV 속 예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역 시절과는 다른 모습으로 대중에게 신선함을 물론 색다른 재미까지 선사하며 선수 생활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의 찰스 바클리’, ‘매직 히포’ 등의 별명으로 농구팬은 물론 국민적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던 대한민국 농구계의 레전드 현주엽 해설 위원 역시 ‘힘을 내요 슈퍼파워’라는 유행어와 함께 어느새 TV 스타로 대중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꽃피는 2016년 3월의 새봄, 농구 해설과 방송 출연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MBC 스포츠 플러스 현주엽 농구 해설위원을 이슈메이커가 만나보았다. 


 

Q. 국민 MC 강호동에 이어 최근 스포테이너의 선두 주자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 지난해 무한도전 출연 이후 오랜만에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실시간 검색에도 연일 제 이름이 노출되며 주목을 받았고, 많은 분이 이때부터 방송 출연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본격적으로 방송 출연을 결심한 것은 무한도전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하루 정도 즐겁게 놀다 오며 추억을 만들고자 출연했던 것인데 실제로 수많은 전문 방송인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제자리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Q. 그렇다면 본격적인 방송 출연을 결심했던 계기가 있었을까요?

- 사실 제 성격상 예능 프로그램과 어울리지도 않고 저 역시도 방송 출연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tvN ‘촉촉한 오빠들’과 SBS ‘정글의 법칙’ 출연 이후 조금씩 방송에 대한 흥미가 높아졌으며 선수 생활 이후 오랜만에 도전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은퇴 이후 오랫동안 대중과 멀어져 있었기에 대중의 관심도 그리워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고정적인 방송 출연을 고심했던 상황에서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부분은 두 아들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제가 선수 생활을 은퇴했기에 두 아들은 아빠가 유명한 농구 선수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농구 해설을 시작했을 당시에도 TV 속에 나오는 아빠의 모습을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습니다. 두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는 본격적인 방송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Q. 최근 예능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며 수많은 러브콜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을 선택할 때 고려되는 사항들은 무엇이며, 방송인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 아직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방송을 가리거나 선택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제의와 기회를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방송 주제가 무겁거나 어려우면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아직 전문 방송인이 아니기에 정해진 콘셉트가 있는 프로그램보다 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조금 더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중들 역시 현역 시절과는 다른 저의 솔직하고 가식 없는 모습에 신선한 재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최근 스포테이너가 주목을 받으며 은퇴한 스포츠 스타들의 방송 출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보편화된 것도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Q. 본인이 출연한 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무엇이며, 방송 출연을 해오며 어려웠던 부분은 어떤 점이 있었을까요?

-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무한도전, 촉촉한 오빠들, 정글의 법칙 등에 출연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MBC ‘위대한 유산’, 채널A ‘머슴 아들’, ‘개밥 주는 남자’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으며 기타 예능 프로그램에도 패널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방송 경험이 부족하고 이를 과분한 기회라고 생각하기에 딱히 어떤 프로그램을 꼽기보다 잠깐이라도 출연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대부분 리얼리티로 진행되다 보니 사생활 공개를 해야 하는 부분이 조금은 어려웠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모습을 방송에 내보내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최근 ‘위대한 유산’을 통해 아이들이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농촌 생활을 해보고 많은 경험을 쌓게 되며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 현역 시절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 대신 두 아들을 사랑하고 가정적인 현주엽 위원의 새로운 모습에 시청자들은 흥미와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본인에게 아이들은 어떤 의미이며, 아빠로서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 저는 서른이 넘는 나이까지 아버지 곁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아버지와 뽀뽀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애정표현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특히 함께 여행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해줬던 것처럼 저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주려고 합니다. 또한 은퇴 후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간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 역시 두 아이와 아내 덕분입니다. 그렇기에 아빠로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반면 남편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는 점이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Q. 다른 선수들보다 늦은 나이에 농구에 입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농구 선수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려서부터 농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농구 명문 휘문 중학교에서 선수 테스트를 받았지만 당시 뚱뚱하고 농구 실력도 부족했기에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구 특기생으로는 휘문 중학교에서 탈락했지만 일반 학생으로 휘문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농구부의 문을 두드렸고 비로소 휘문중 농구부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입단하고도 1년 동안은 벤치를 지켰지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고 살도 빠지며 2학년에 올라가서는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Q. 휘문고 시절부터는 초고교급 선수로 각 대학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당시 대학 최고 명문인 연세대의 러브콜을 뒤로하고 고려대로 진학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 당시 대학 최강은 누가 뭐래도 연세대였습니다. 연세대에 진학하면 편하게 운동하며 우승도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대 출신인 아버지께서 한창 성장할 시기에 너무 쉬운 길만 찾다 보면 발전은커녕 퇴보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저 역시도 많은 고민 끝에 승자의 위치가 아닌 도전자의 자격으로 고려대에 입학해 연세대를 이길 수 있다면 더 큰 보람과 발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암골 호랑이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입학한 이후에도 연세대가 농구대잔치 최초로 대학팀 우승을 기록했기에 흔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연세대를 강팀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신기성, 그리고 저로 이루어진 고려대 농구부는 대학 최강임을 자부하며 실제로 승수도 더 많았습니다. 

 

 

 

Q. 현주엽 위원의 대학 시절은 대한민국 농구사의 황금기였습니다.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 저는 여동생도 없고 선수 생활을 통해 남자들 속에서 운동만 했기에 오빠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여성팬들의 ‘오빠’ 소리가 어색하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아플 정도로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시기입니다. 지금 활동 중인 웬만한 아이돌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당시 집에 있는 유선 전화를 내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팬들의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팬레터와 선물이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며 집 앞에 기다리는 팬들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기에 지금은 당시의 인기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Q. 흔히 농구팬들은 현주엽 위원의 라이벌로 서장훈 선수를 꼽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라이벌이 있을까요? 

- 건방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현역 시절 저의 라이벌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 생활 동안 누구와 붙더라도 힘들지 않았고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누구보다 많은 노력이 동반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저와 서장훈 선수를 라이벌로 비교하는 사람이 많은데 둘의 농구 스타일은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1년 선배인 서장훈 선수와는 중학교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인연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지만 아직도 만날 때마다 서로 자신의 농구 실력이 한 수라고 주장합니다. 대중들은 우리를 라이벌로 보지만 우리는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며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서장훈 선수와 혈기왕성했던 시절이 아닌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성숙해졌을 때 한 팀에서 뛰어보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Q. 아직도 농구계에서는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대형 트레이드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 농구 최고 스타로서 당시 서운한 감정은 없었을까요?

- 1998년 전체 1순위로 당시 청주 SK에 입단하게 되었고 고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서장훈 선수와 한 팀에서 뛰게 됐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우리 두 사람의 만남으로 향후 10년간 우승은 거뜬하다고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는 시너지 효과보다 포지션 중복 등의 문제점이 부각됐던 상황이었고 당시 감독님까지 교체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팀의 더 나은 성적을 위해 트레이드가 이뤄졌고, 1위 팀에서 최하위 팀으로 옮기다 보니 서운한 점도 없지 않았고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골드뱅크 이적 후 농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기에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소속팀에 남아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게임을 읽고 조율하는 힘과 패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SK도 해당연도 우승을 차지했기에 당시에는 아쉬운 트레이드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가 WIN-WIN 할 수 있는 트레이드였다고 생각합니다.

 

Q. 농구 팬들은 아직도 현주엽 위원의 화려했던 수많은 현역 시절의 플레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인생 최고의 경기는 어떤 경기일까요? 

- 고등학교 시절 팀을 득점을 도맡다 보니 상대 팀의 견제도 심했습니다. 특히나 저를 막을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며 자극을 해온 팀이 있었는데 해당 경기에서 당시 코치님께서 상대방의 자극을 실력으로 이겨보라며 마음껏 득점하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날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지 않고도 63점을 득점했으며 이는 아직도 고교 한 경기 최다득점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대학 입학 전 고려대가 직전 대회에서 8강 탈락했지만, 제가 팀에 합류 후 라이벌 연세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지만, 그렇다 해도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던 순간이 자타가 인정하는 인생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조금은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됐습니다. 현역 생활 연장의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었을까요? 

- 현역 시절 무릎 수술만 4번 받았습니다. 무리를 했다면 1~2년은 현역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겠지만 팀과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며 조금이라도 기량이 남아있을 때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기에 후회 없이 떠나고자 했습니다. 다만 프로 선수 생활 중 우승 경험이 없었다는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추후 좋은 기회가 있다면 지도자로서 꼭 우승 헹가래를 받고 싶습니다. 더불어 은퇴 시기가 아버지 임종과 겹쳐 준비 없이 은퇴했기에 코트에서 저의 마지막 경기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고 떠난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Q. 현역 시절 본인의 농구철학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 저를 알고 기억하는 모든 팬에게 농구를 잘했던 선수로 기억에 남았으면 합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한국의 찰스 바클리’라고 불렀지만 저의 롤모델은 매직 존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도 그가 추구하는 농구를 쫓고자 노력했으며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를 모두 잘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뭐 하나 특출난 부분이 없어서 그랬다고 가끔 농담 삼아 이야기하지만 경기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또한 농구는 팀플레이기 때문에 동료를 살려주는 선수가 좋은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향후 농구인으로, 방송인으로 현주엽의 모습을 더욱 자주 볼 수 있게 될까요?

- 3월까지는 프로 농구 시즌이기에 지금 맡은 해설 활동에 집중할 예정이며, 지금 고정으로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농구 시즌이 마무리 된 후 좋은 기회가 있다면 시청자들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계획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방송을 시작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방송 출연을 통해 조금이라도 농구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방송 참여로 한국 농구가 과거의 인기와 명성을 되찾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농구인으로, 방송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저의 모습을 지금처럼 아껴주시고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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