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s Focus
통합진보당의 행보
지난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가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이후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신세로 전락했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고 지켜봐 왔던 이들은 이러한 장면에 충격과 배신감을 쏟아냈지만, 한편에서는 오히려 통합진보당이 한 번은 겪어야 할 성장통으로도 받아들이고 있다.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10시간이 넘는 격론 끝에 ‘조건부 지지 철회’라는 공식 방침을 내놓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되, 통합진보당 중앙위에서 결의된 혁신안의 시행 여부를 지켜보고 지지여부를 다시 판단하겠다고 내비쳤다. 이석기·김재연 등 당권파 비례대표 당선인·후보자들의 사퇴 여부는 쇄신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이들의 사퇴 없이 당의 외연 확대는 물론 존립 자체도 어려워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이에 당권파는 혁신비상대책위원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당원비상대책위원회’를 도모하고 나섰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보를 외치는 어떤 인물이 현명한 판단으로 진보의 미래를 존립시킬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진보통합의 시작과 분열의 조짐
2011년 7월 14일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대담집 <미래의 진보> 출판기념회가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당시 출판기념회는 몇 차례 연기됐고, 이정희 대표는 행사 직전까지 참석 여부를 고민할 정도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을 자극해 반발을 크게 샀던 시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황리에 출판기념회를 마친 뒤 전국을 돌며 북콘서트를 열었고 우여곡절 끝에 11월 17일 심상정·노회찬 등 진보신당 탈당파가 합류한 3자 통합이 성사됐다. ‘운동권 정당’에서 ‘수권정당’으로 탈바꿈하려면 대중성을 갖춘 국민참여당이 필요했던 민주노동당과, 지난해 4월 27일 경남 김해을 보궐선거에 실패한 뒤 독자 생존이 어려워진 국민참여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진보정치의 ‘우경화’란 평가와 ‘외연 확대’라는 평가가 엇갈렸지만 어찌됐든 ‘이정희와 유시민’은 겉보기에 ‘하나’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경선 부정사태는 정치계를 시끄럽게 했고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당권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이석기 당선인이라는 것이다. 이 당선인은 자신이 먼저 참여당 통합을 가장 먼저 제기했고, 개량주의라는 욕을 먹으며 '리버럴(Liberal) 진보가 가능하냐', '따뜻한 아이스크림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며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진보세력이 민노당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고, 진보 진영의 새로운 정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경선 부정 사태의 해결 방안과 관련해 “유 대표와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도 밝히며 12월 공식 창당 이후 다섯 달 만에 서로의 ‘다른 뜻’을 확인했고 이석기 당선인은 ‘정치 방식’의 차이가 너무 컸다는 표현을 썼다.
이미 4월 총선을 앞두고 통합진보당 내부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드러났다. 유시민 대표는 당내 지역구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월 ‘당무 거부’라는 파업을 벌였고, 각 지역에서 경선 룰을 둘러싸고 정파 간 갈등이 심해졌으나 공동대표단의 중재·권고안은 아무 필요도 없었다. 당시 유 대표는 당 누리집 게시판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썼고, 당무 거부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표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유시민 대표의 당무 거부는 후보를 독식하려는 당권파의 패권주의와, 유령당원 동원 의혹 등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에 대해 ‘계속 이러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3월 중순 온라인투표 소스코드 변경과 무효표 처리를 둘러싼 비례 8번과 10번의 순위 변경 등 비례대표 경선과 관련된 문제는 서둘러 봉합됐다. 이는 3월 21일 이정희 대표가 나섰던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 여론조사 경선 부정, 경기 성남 중원 후보였던 윤원석 전 <민중의 소리>대표이사의 성추행 전력 파문과 더불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후보 등록(3월22~23일)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공동대표단은 일단 선거부터 치른 뒤 진상조사를 하자며 비례대표 경선문제를 덮었고, 통합진보당은 문제 해결은 커녕 문제를 안고 총선을 치른 것이다.
결국, 원내교섭단체(20석)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었다. 전국적인 야권 연대의 경험을 쌓으며 제3당으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의석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 시민 대표는 총선 결과에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권파는 6~7석을 얻고 진보신당 탈당파인 심상정 대표와 노회찬 대변인은 생환했지만, 국민참여당계는 전북 남원·순창에서 1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예견되었던 파장
5월 7일 오전 통합진보당 대표단 회의 시작 전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에게 싸늘한 얼굴로 서로의 다른 의견에 대해 따져 물었다. 앞서 열린 전국운영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 대표는 이 대표의 회의 운영 방식에 항의하며 이 대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때마침 터진 5월 2일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형 폭탄이었고, 두 대표 사이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정치 방식과 상황인식의 차이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시민 대표는 “우리 당이 민주주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느 누구의 책임을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이 책임져야 한다”는 태도인데 반해, 이 대표는 “부정선거가 아닌데 당권파와 당원들을 모욕·무고하고 있다”고 맞섰다. 당권파 쪽에서 유 대표를 향해 “동지로 위장해 세작질을 일삼는다”는 비난의 말이 나올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게 치달았다.
불신 또한 깊어졌다. 사태 초반 이 대표는 유 대표에게 당권을 맡아달라고 제안했으나 유 대표는 거절했다. 진보정당의 지도자라면 당권을 맡아 최대한 내부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유 대표가 너무 정치공학으로 접근한 것 같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 대표는 당권파가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대체 바꿀 의지가 있는 건지 궁금하고도 두렵다고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당권파가 당권을 제안한 이유가 그냥 안주하겠다는 건지, 정말로 변화의 의지를 담은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6월 3일 통합진보당은 새 당 대표를 뽑기로 했다. 이는 공동대표단의 과도 체제에서 벗어나는 의미도 있지만 대선 후보 경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합진보당이 새누리당·민주통합당과 달리 당권과 대권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권파는 이정희 대표를 내보내거나, 이 대표가 부정 선거로 인해 도덕성에 흠집이 간 점을 고려, 광주의 오병윤 당선인을 내보내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상정 대표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었으나 국민참여당계는 내부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심상정 대표에 대해서는 ‘정통 진보’가 아니라 출마할 경우 인천연합·울산연합 등 민주노동당계 비주류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에 고민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선 부정 사태로 인해 유시민 대표와 이정희 대표는 모두 불출마 의사를 밝혔고, 심상정 대표의 출마도 어렵게 된 것으로 보인다. 통합진보당의 ‘진상보고서 결과에 따른 후속 처리 및 대책을 위한 특위’ 구성과 활동 결과 등에 따라 당대회 자체가 계속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알려진다. 이 역시 외부 인사 6명을 포함해 11명으로 이뤄지는 특위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도 힘겨루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파장이 커서 상당 기간 재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정릐 대표와 달리, 유시민 대표는 기존의 지지자들을 바탕으로 오히려 정치적 긍정 효과를 보게 됐다는 주장도 재기되고 있다. 초기 개혁당 시절부터 열린우리당, 국민참여당에 이르기까지 ‘정당 개혁’을 외쳐온 유 대표가 통합진보당 쇄신 과정에 기여할 수 있고, 결과에 따라 당내 입지나 정치적 영향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불투명한 야권 연대 다시 출발해야
경선 부정 사태는 12월 야권의 대선 연대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천호선 통합진보당 대변인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야권 연대에 나서거나 대선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심상정 대표 역시 5월10일 전국운영위원회에서 “우리 당이 해결 기회를 만들지 못하면 정권 교체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때문에 야권 연대 파트너인 민주통합당은 갈팡질팡이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곤혹스럽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통합진보당이 국민 눈높이를 보고 지혜롭게 해결했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국민들은 지난 총선에서도 야권 단일화를 했고 대선도 그렇게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이 민주당에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 슬기롭게 빨리 진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총선을 지켜본 뒤 야권 연대가 중도층 이탈을 가져왔다며 ‘야권 연대 재고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따가운 국민의 시선이 민주·진보 진영 전체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진보정당운동에 나름 오랫동안 참여해온 사람들의 실망은 남다를 것이다. 민중당부터 가깝게는 통합 전의 민주노동당까지 다양한 진보정당운동에 함께해온 사람들도 이런 사태를 눈앞에 두고는 더 이상의 지지가 어렵다는 상황이다.
서울 종로구에 거주하고 있는 직장인 유 모 씨(남.33)는 “진보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故노무현 대통령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도 불사하는 정치적으로 진보라는 단어보다는 민중에 가까운 것이 진보라는 것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대 국회부터 열렬히 지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 4번을 기표한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도 불사하겠다는 그들의 자세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진보의 개념이 통합진보당으로 대표되는 프레임으로 규정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이어져온 진보정당운동은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노동자와 서민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통합진보당 창당은 유시민·노회찬·심상정이라는 정치인들의 재기와 이들에 대한 지지세를 활용해 민주연립정부를 구성해 정부기구에 합법적으로 진출하려는 시대착오적 운동권 정파의 야망으로 시작됐고, 이것이 오늘의 사태가 벌어진 진정한 이유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손해를 본 것은 어느 정치인, 어느 정파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하려 했던 수많은 통합진보당의 평당원들일 것이다.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통합진보당은 당장의 위기를 헤쳐나갈 슬기로움을 발휘할 것이라 기대해 본다. 현명한 진보를 추진하는 당원을 자청한다면 진보정당운동 자체를 혁신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잘 알 것이다. 진정한 보수를 품고 가는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통합진보당이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진보정당의 신뢰를 되찾고 진정한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정당이 되길 바란다.
기획/남윤실 기자 글/박성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