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 운동가, 심산 김창숙
유림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 운동가, 심산 김창숙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8.03.06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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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유림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민주 운동가, 심산 김창숙


독재 권력을 향한 비판 정신을 싹 티우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중 유림계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기 직전, 유림계가 국가의 사회 최고 지도층이었기에 피식민의 원흉으로 지목돼서다.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되지 않았을 뿐 유림계는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심산 김창숙은 대표적인 유림계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이후 독재 권력에 저항한 민주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본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분노하다

김창숙은 1879년 경상북도 상주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당대 이름 높은 유학자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집안은 철저한 성리학 가문이었지만, 김창숙의 부친인 김호림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더 이상 귀천을 따질 필요가 없다며 농업 종사를 강조했고 식솔로 있던 종과 일꾼에게 식사를 먼저 주고 김창숙과 학동들에게는 나중에 주기도 했다.
 

유학자들을 포함한 사회지도층의 상당수는 일본이 한국을 겁박할 당시, 회유를 받고 친일노선을 걷기도 했다. 김창숙은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을사조약 당시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리고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제출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의 실권을 거의 장악하자 일진회는 한일합병론까지 제기했는데, 이때 김창숙은 그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중추원에 보냈다.
 

일본은 청과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연이어 물려내고 영국과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지지속에서 한국을 병합했다. 김창숙은 3·1운동 당시 가장 큰 체포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유림들은 기독교나 동학계통, 불교 인사가 중심이 된 3·1운동을 보고 자신들 또한 힘을 보내길 원했다. 이에 전국 유림 대표들은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해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보냈으나,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전국 유학자 수백 명을 체포했다. 이 사건이 유명한 ‘파리 장서사건’이다.
 

김창숙은 3·1운동 이후 국내 활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정부 내 파벌 갈등을 조정하는 데 힘썼고 쑨원(孫文) 등 중국국민당의 유력자와 만나며 다양한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창숙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경계했던 이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에 신탁통치를 청원한 문제로 임시정부 내에서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다. 김창숙은 신채호, 김원봉 등 진영을 가리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민주 운동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사는 갈등과 폭력의 연속이었다. 좌익과 우익 진영은 서로를 향해 무자비한 테러를 행했고,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질서를 위한다며 독재정치를 펼쳐나갔다. 38선 북녘에서 김일성이, 남녘에서는 이승만이 권력을 강화했다. 김창숙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수립한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따르지 않고 충칭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지했으며, 과거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된 바 있는 이승만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김창숙은 이승만 정부 때 야당의 지위에 머물며 여당의 부패와 독선적 정치에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빌미로 정부는 김창숙을 체포해 부산형무소에 한 달 넘게 구금했다. 김창숙의 반독재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 재선이 힘들다고 느낀 이승만은 독재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정치깡패를 동원해 국회의원을 연행하는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이에 김창숙은 이시영, 조병옥, 김성수 등 중도·보수 인사들과 함께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에 경고를 보냈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던 친일유생의 강압으로 김창숙은 성균관대학교의 초대 총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김창숙은 1959년 국가보안법 개정, 이승만 정부의 선거부정을 비판하며 2번 더 하야경고문을 보냈는데, 이는 독재 권력에 맞선 세 번의 하야경고문이었다. 

 

김창숙은 직접 행정부의 지도부가 되어 대한민국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1951년 제2대 부통령 선거 후보자로,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바 있다. 하지만 두 번의 선거 모두 낙선이었다. 이는 반독재민주이념이 투철했던 김창숙이 독재 권력에 얼룩진 한국현대사에서 행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낙선 이후 병세가 악화된 김창숙은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병문안을 받았으나 외면하기도 했다. 
 

김창숙은 1962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나, 같은 해 5월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심산김창숙연구회는 1986년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낸 김창숙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에 심산상을 수여한다. 심산상을 수상한 인물은 잘못된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할 줄 아는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다. 2000년 심산상을 수상한 故 김수환 추기경은 김창숙을 가리켜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며 그의 묘소에서 유교예법에 따라 절과 음복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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