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 용인시에 자랑이 되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 용인시에 자랑이 되다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11.0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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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 용인시에 자랑이 되다


만주에서 자란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 한국 교육자로서의 삶 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람들과 합심해 대일본항쟁을 벌인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과 아버지 오광선 광복군 장군, 광복군 뒷바라지에 헌신한 정현숙 지사, 최전방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언니 오희영 지사와 그의 남편 신송식, 이들 모두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가족들의 영향으로 오희옥 선생도 조선 청년들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공연해 일제의 악행을 널리 선전하고, 일본군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해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용인시 특집을 맞아 용인시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원 오희옥 선생을 만났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독립운동 

오광선 광복군 장군과 정현숙 자사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난 오희옥 선생은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생활했던 오 선생은 그 누구보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중국 토교라는 곳에는 신한촌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함께 거주했습니다. 당시 저는 또래 중국인으로부터 ‘고려족 노예’라 놀림을 받았었죠. 그때마다 나라 없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라고 전했다. 오늘날 중국의 명문 사립중학교로 알려진 청와중학교에서 뛰어난 수재였던 그는 수영뿐만 아니라 마라톤 선수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임시정부를 도와 중국인들에게 일본의 악행을 선전하거나 광복군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 임시정부에 많은 도움을 줬다. 
 

  오인수 의병장의 유지를 받든 오 선생의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지청천 장군과 협심해 일제군에 대적했고, 봉오동, 청산리, 대전자령대첩 등 크고 작은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그 동안에 광선의 처 정현숙 지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광복군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집안을 살뜰히 살폈다. 이러한 부모의 영향으로 장녀 오희영 지사는 오 선생과 같이 유주신전청년공적대대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군 제3지대로 이동, 그곳에서 남편 신송식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오 선생은 유주광복진선청년공적대와 광복군 제5지대에서 활약했다.

 

▲ 1945년 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을 기념하는 사진으로, 왼쪽 위에 어린아이는 오희옥 선생의 남동생 오영걸 씨의 모습이라고 한다. 오 선생의 집안 사람들은 임시정부와 함께 만주에서 기거했는데, 이때 김구 선생, 이시영 선생 등 당대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뜻을 같이 했다. 

해방 후, 초등학생 교육자로 변신


해방 이후, 오희옥 선생의 가족은 기나긴 타향생활을 접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 김구 선생의 밀지로 일본군 처단에 나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오광선 대장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아버지는 한국군에 배속됐다. 평소 배움에 관심이 많았던 오 선생은 서울 진명여고를 4년간 다녔고, 국내에 있는 화교 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 용인시에 거주했다. 오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는데, 어제에 친구가 오늘날 적으로 변한 모습에서 많은 감정이 오갔으리라 짐작된다. 휴전 후 그는 수원 매상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러 정식 교사가 됐다. 1953년 원산초등학교에서 근무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그는 청년 분교, 시흥시 신동초등학교를 거쳐 수색, 은평, 충무, 불광, 홍재, 홍은, 인왕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30일 서울 고은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독립운동가 3대 자손까지 오래도록 살 수 있기를 기원


옛말에 독립운동을 하면 3대 씨가 마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독립운동가의 길이 힘들고, 고됐으며, 친일파와 일제가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희옥 선생의 집안사람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에 혜주 오씨 종친회에서는 이들 집안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오희영 자사는 44살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동생 오영걸 씨는 폐암으로 사망해 현재 3남매 중 오 선생만이 살아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과 지원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친일파 자손들이 국내 주요관직을 꿰차고 있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왜곡 문제는 여전히 후손들이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오희옥 선생의 말처럼 과거를 바로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지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제72회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오희옥 선생은 애국가를 제창했고,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에 대한 그의 뜻을 전달했다. ⓒ 오희옥 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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