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업계 ‘캐즘’ 장기화 우려에 전전긍긍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연이은 화재에 시민 불안감 확산
최근 인천의 한 대단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건 이후 전기차 안전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정부와 관련 업계의 적절한 대책이 빠르게 나오지 않으면 논란과 갈등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기차 호감도 급락, 중고차 매물 증가하기도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의 여파는 크다. 최초 화재 발생 차량의 불씨는 근처 차량 87대로 옮겨 붙었고, 이로 인해 지하 1층에 함께 주차된 783대의 차량이 심각한 열손과 그을림 피해를 입었다. 아파트 14개 동 1581세대 중, 5개 동 480여 세대의 전기 공급이 끊겼고 일부 세대는 단수까지 됐다. 화염은 지하에 설비된 수도관을 비롯해 각종 설비를 녹여버려 피해 주민들은 인근 동 행정복지센터, 학교, 경로당, 봉사관, 연수원 등에 마련된 임시거처를 찾아야 했다.
8시간 20분 동안 화재가 지속되는 동안 진압에 어려움을 겪은 점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진화가 어렵다. 전기차 화재는 ‘열폭주’ 현상 때문에 일반적인 방식으론 진화가 어렵다. 한번 불이 나면 전기차 배터리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온도가 용광로에 버금가는 1,000도까지 올라간다. 일반 분말소화기를 사용해도 소화분말이 리튬배터리 내부까지 미치지 못해 냉각효과도 거의 없다. 또한 지하주차장에서 전기차 화재가 발생하면 위험성이 더 커진다. 지하주차장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화재 진압이 까다롭고 유독가스 등 화재 연기배출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전기차 화재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전기차 지하주차장 출입금지’ 현수막을 내건 건물까지 등장하며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가 확산하고 있다. 또한 전기차 차주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국내 중고차 시장에서 전기차 매물이 많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전기차 주차·충전시설 설치는 의무사항이다.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100가구 이상 신축 공동주택은 주차 대수 5% 이상, 2022년 1월28일 이전 건축허가를 받은 아파트는 2% 이상 범위로 전기차를 포함한 친환경 자동차 전용주차구역을 설치해야 한다. 지상이나 지하 설치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입주민 의결에 따라 지상주차장 또는 별도의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지하주차장은 아파트의 공용부분에 해당해 특정 차종에 대해서만 접근을 막을 경우 재산권 침해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전기차의 지하주차장 주차가 논란의 핵심이 된 것은 ‘주차 중’ 일어나는 전기차 화재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이달까지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24건으로 14건(58.3%)이 주차 중 화재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전기차 보급률 또한 높아지는 추세로, 사고 유형과 빈도가 이전보다 다양해지고 많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환경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국내에 등록된 전기차 누적 대수는 60만대를 넘어섰다. 2017년 등록대수 2만 5,000여대에서 지난해 54만 대로 급속히 늘고 있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전기차 호감도도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 데이터앤리서치가 발표한 전기차 호감도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전기차 순호감도는 17.84%로 전년 동기 대비 34.68%p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종합대책 발표 예정
자동차 업계는 이번 사고가 전 세계적인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속 국내 자동차 수요에 악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7월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8만 613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3.4% 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터리 불량에 따른 화재는 공포심을 조장해 캐즘을 장기화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우려다.
완성차 업체들은 이상 징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론 대대적인 세부 점검을 실시해 고객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기아는 8월 21일부터 BMS(배터리관리시스템)가 감지한 배터리 이상 징후를 고객에게 문자 메시지로 신속히 알리는 시스템 운영을 시작했다. 아울러 ‘전기차 고객 케어방안’으로 고전압배터리 상태 진단을 포함한 9가지 중요 항목에 대해 무상 점검과 함께 긴급한 상황을 대비한 긴급 상황실도 운영 중이다. KG모빌리티도 전기차 특별 안전 점검을 실시하기로 했으며, 렉서스코리아는 오는 9월 30일까지 전국 렉서스 공식 서비스 센터에서 총 57가지 항목의 정기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전기차 무상 점검 서비스 캠페인을 진행한다.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배터리 업계도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와 마찬가지로 이번 화재에 따른 전기차 포비아가 악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다. 이에 자사 제품의 안전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안전진단 소프트웨어’ 사업 확대에 본격 나선다고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이미 검증된 안전진단 정확도와 축적된 기술력을 토대로 완성차 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안전진단 소프트웨어의 본격적인 협업 및 판매에 나서기로 했다”고 전했다. 삼성SDI 역시 차세대 BMS 개발을 위해 관련 연구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관계 부처들은 9월 초 발표를 목표로 인천 지하주차장 화재 재발 방지책을 마련 중이다. 우선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화재진압 장비를 확충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질식소화덮개는 현재 722개, 이동식 수조는 202개, 방사장치는 1,505개 보유하고 있는데, 청은 올해 총 166개를 보강할 방침이다.
한편 국토부는 내년 2월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제작사들이 전기차 배터리가 안전기준에 적합한지 여부를 국토부 장관의 인증을 받고 제작·판매하는 것으로, 정부가 배터리의 안전성을 사전 인증한다는 의미다. 이울러 자동차 배터리 식별번호를 차량 등록 시 별도로 등록하도록 하고, 운행부터 폐차까지 이력을 관리하도록 했다. 국토부의 경우 지난해 말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함께 공동주택 전기차 화재 대응 매뉴얼을 발간해 배포했고, 올해부터는 신차를 대상으로 하는 자동차 안전도 평가에서 배터리 안전을 평가 항목에 추가했다.
인천 화재 사건 때 불이 났던 벤츠 EQE에 중국 파라시스의 배터리가 탑재된 것으로 조사되면서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는 차량의 크기와 무게, 최대 출력, 전비, 배터리 용량 등만 안내한다. 앞서 유럽은 오는 2026년부터 전기차 제조업체들이 소비자에게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정부는 자동차 제조사가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를 차량 제원 안내에 포함해 공개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과충전’을 막을 방안도 논의된다. 단기적으로는 충전율과 충전시간을 제한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과충전을 방지할 장치 부착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100% 완충 전기차는 그렇지 않은 차보다 화재 발생 시 파급력이 훨씬 강하다. 배터리 잔량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충전 시간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과충전 예방이 가능하다.
환경을 추구하는 전 지구적 과제로 전기차 시대로의 패러다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부도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 안에 따라 2050년까지 전기차 수소차 비중을 85% 이상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2030년까지 전체 등록차량 2,700만대의 17%를 전기차 수소차로 채우겠다는 목표인데, 다만 이에 대해 ‘안전’이라는 진입장벽을 먼저 통과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