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김갑찬 기자]
해설위원으로 돌아온 KBO 레전드
이글스의 영원한 NO. 15
2024 KBO 리그도 시즌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특히 올 시즌은 유례없는 역대급 순위 경쟁이 이어지며 프로야구 역대 최다 관중을 넘어선 것은 물론 꿈의 1,000만 관중 시대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 전후로 주춤했던 프로야구의 인기가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 중 미디어의 힘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강야구’를 필두로 기존 미디어뿐 아니라 유튜브와 OTT 등 뉴미디어까지 다양한 야구 콘텐츠 제작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더불어 기존 스포츠 채널 역시 최근 야구팬의 눈높이에 맞춘 스타플레이어 출신 해설위원을 대거 영입하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글스의 영원한 NO.15인 대성불패 구대성 해설위원도 이들 중 하나다. 현역 시절 소속팀은 물론 국제 대회에서 유독 강렬한 모습을 보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왼손 투수이자 레전드인 그가 올 시즌부터 SBS 스포츠 야구 해설위원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뿐 아니라 마운드 위에서의 카리스마 넘쳤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은 그의 또 다른 도전을 두 팔 환영했다. 더불어 국내 무대 은퇴 후 오랜 시간 국내 야구와 접점이 많지 않았던 그의 최근 행보 때문에 갑작스러운 해설위원 합류가 추후 지도자로서 국내 무대 복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중 8위에 선정되며 KBO 올타임 레전드임을 증명했던 희로애락 가득한 그의 지난 야구 스토리 이슈메이커 9월 추석 특집호에서 기록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근황을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다
“이슈메이커를 비롯해 최근 다양한 매체에 얼굴을 비추며 오랜만에 야구팬들에게 인사도 전하며 적극적으로 소통을 나누고 있다. 그 시작은 SBS 해설위원으로의 합류다. 어쩌면 오랜 시간 국내 팬들에게 제 소식을 전하지 못했기에 야구 중계뿐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게 예의이지 않을까 해서 시간을 쪼개 적극적으로 미디어에 출연 중이다.”
해설위원 합류는 어떻게 이뤄졌나
“예전부터 해설에 욕심은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WBC 대회를 앞두고 SBS PD님께서 제가 호주에 있었기에 호주 선수들과 팀의 특징을 알려달라했고 영상으로 촬영해 보내드린 적이 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SBS 스포츠 측에서 해설위원 제의가 왔다. 물론 해설하고 싶은 마음은 강했으나 선뜻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고민을 이어갈 때쯤 와이프와 딸이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어필해서 저 역시도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었다.”
해설위원으로 처음 마이크를 잡은 기분은
“처음에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야구를 그대로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중개를 시작하고 나니 모든 것이 낯설고 쉽지 않았다. 특히 오랜 시간 국내 무대를 떠나있었기에 선수들도 경기장도 문화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야구 본질 외적인 부분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이유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방송 용어이다. 현장에서 쓰는 단어가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말 한마디의 무게감이 다르니 생각이 점점 많아지더라. 그래도 전반기를 마치고 후반기에 들어서며 조금씩 적응되고 편안해졌고 주변에서도 많은 분들이 칭찬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지도자로서의 현장 복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물론 지도자의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금 맡고 있는 해설이 우선이다. 추후 제가 가진 경험들로 선수들 특히 투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도자 제안은 충분히 검토 가능하다. 前 소속팀인 한화뿐 아니라 어디서든 제 능력이 필요하다면 열린 마음으로 함께 할 계획이다.”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
“흔히 스타 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저 역시도 현역 시절에는 내가 가진 야구 철학을 강하게 이어갔다면 향후 지도자로서는 선수에게 모든 것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점보다는 장점을 골라서 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면 단점은 충분히 가려질 수 있다. 따라서 제가 가진 확고한 지도철학은 선수들의 장점을 끌어 올려주는 데 있다.”
현역 시절 유독 일본전에 강했다. 그 이유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고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다. 더욱이 국내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들을 선발해 참가하는 국제대회는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이 뒤따른다. 그중에서도 한·일전이 조금 더 특별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마찬가지다. 아마추어 때부터 일본과의 경기는 조금 더 집중하고자 노력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기에 ‘일본 킬러’라는 별명도 생기지 않았을까?”
WBC 한일전 당시 이치로 선수의 사구는 본인이 시킨 것인지
“그날 이후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본 질문이기도 하다. (웃음) 단언컨대 제가 배영수 선수를 지목해서 시킨 것은 아니다. 야구를 조금만 아는 팬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가 등판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특정 선수에게 지시할 수 있었을까? 다만 이치로 선수 역시 당시 우리를 자극시킬 수 있었던 발언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고참 선수로서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치로 선수가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누구든 그를 맞춘다면 10,000 円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적은 있으나 특정 선수에게 꼭 이치로 선수를 맞추라고 시키지는 않았다. 마침 당시 배영수 선수가 등판을 앞두고 있었고 진짜로 10,000 円을 주는 것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더불어 이후 위기가 찾아오면 제가 등판해 확실히 막아주겠다고 했고 실제로도 추가 실점 없이 해당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국내 무대에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일본에서의 커리어를 뒤로하며 꼭 메이저리그 진출을 하고 싶었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야구의 본고장인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는 것이 꿈 아닐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 당시 야구 관계자와 팬 모두 제가 뉴욕 양키스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했다. 저 역시도 당연히 양키스에 합류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갑작스럽게 여러 가지 이유로 뉴욕 양키스가 아닌 뉴욕 메츠에 입단하게 됐다. 양키스나 메츠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물론 지금은 최고령 메이저리그 데뷔 기록이 다른 선수로 바뀌었으나 당시에는 제가 최고령 신인이었기에 그 부분도 의미 있었다.”
조금 더 일찍 미국 무대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 않나
“물론 아쉽다. 지금도 후배 선수들에게 기회가 되면 가급적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외 진출을 하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저도 가끔 일본을 거치지 않고 30대 초반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지 않았겠냐고 생각한다. 30대 중반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으나 실제로 힘에서 밀리는 느낌이 있었기에 때문이다.”
랜디 존슨의 공을 받아 쳐 2루타를 만들기도 했다
“투수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는데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타자로서의 모습이니 아이러니하다. (웃음) 메이저리그는 당시 내셔널리그의 경우 투수도 타석에 들어섰고 저 역시도 당대 최고의 투수라는 랜디 존슨과 맞대결을 펼친 바 있다. 물론 타석에서 2루타를 기록했으나 이후 홈에 쇄도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슬라이딩을 했고 결국 부상으로 이어져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인데 당시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 같다.”
한국 무대 복귀 후에도 오랜 시간 마운드에 섰다. 그 원동력은
“물론 제가 운동하던 시기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으나 그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결국 투수라면 하체가 튼튼해야 했고 이를 위해 런닝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점이 오랜 선수 생활의 노하우 아니었을까? 특히 당시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훈련법이 없었고 웨이트도 많이 하지 않았기에 열심히 뛰는 것이 하체 근력을 키우는 일이는 확신에서였다.”
현역 시절 혹사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주변에서는 혹사만 당하지 않았어도 더 좋은 커리어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하나 저는 단 한 번도 혹사를 당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속팀에서든 국제 대회에서도 많은 경기에 출전하고 많은 공을 던졌기에 지금의 구대성이 존재하고 이를 팬들이 기억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당시에도 제가 던지기 힘든 순간이었다면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학창 시절부터 은퇴하는 순간까지도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나를 위해 공은 던졌기에 단 한 번도 제 커리어가 혹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구 결번이 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은 없나
“물론 커리어 내내 유니폼에 새겨졌던 등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남는다면 선수로서 이보다 더 멋진 순간이 있을까? 그렇기에 저 역시도 아쉬운 마음은 있으나 그건 오롯이 제 개인적인 입장일 뿐이다. 혹자는 구단과의 불화가 있어서가 아니겠냐고 오해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은퇴 당시 제가 선수 신분이었으니 구단에 직접적으로 영구 결번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결정은 구단의 몫이고 다양한 이유에서 결정된 부분이었으니 그 과정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오랜 커리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선수들에게 가장 값진 보상은 아무래도 우승 순간이 아닐까? 저 역시도 1999년 프로 선수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기에 해당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획득이다. 당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고 야구에서 첫 올림픽 메달을 거머쥔 순간이기 때문이다.”
팬들에게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제 닉네임이기도 한 ‘대성불패(臺晟不敗)’로 기억되고 싶다. 제가 마운드에 오르면 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팬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 선수로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오랜 시간 진심 어린 야구 이야기를 전했던 구대성 해설위원. 그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꼭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그는 “오랜 시간 저와 한국 야구를 사랑해주신 모든 야구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 전하고자 합니다. 초보 해설위원이긴 하나 앞으로도 조금 더 재미있고 쉽게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 지도자로서 인사를 드리게 된다면 제2의 구대성을 넘어 대한민국 야구계를 이끌어갈 최고의 선수를 키워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야구도 9회 말 2아웃부터 시작인 것처럼 제 야구 인생도 지금부터 시작이니 앞으로 제가 던질 야구 인생 2막도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라며 인터뷰를 마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