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휴전 협상 책임 넘긴 미국 비난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휴전이냐, 확전이냐’ 갈림길 놓인 중동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갈등이 점점 격화되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31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암살된 이후 중동 정세가 일촉즉발의 확전 우려로 치닫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제5차 중동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견이 나오고 있다.
이스마엘 하니예 암살로 일촉즉발 갈등 고조
그간 이스라엘과 하마스 측은 정전 및 휴전 협상 논의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미국과 카타르 등 주변국들이 중재를 모색했고, 특히 대선을 앞둔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3단계 휴전안’을 제안하는 등 종전을 위해 주도적으로 나섰다. 6주간 휴전에 돌입해 인질 및 수감자 맞교환 후 휴전의 영구화 및 이스라엘군 철수, 가자지구 재건의 구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인질이 모두 석방되고 하마스가 궤멸할 때까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도 계속했고, 피란민들이 모인 난민촌과 유엔 학교 등을 타격하기도 했다.
여기에 휴전 협상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정치국 최고 지도자 이스마엘 하니예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이란을 방문했다가 테헤란에서 암살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하니예는 수십 년간 하마스에서 1인자로 군림한 인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분쟁 국면마다 협상을 도맡으며 국제사회에서 하마스 외교의 얼굴로 통했다.
자국 수도에서 귀빈이 암살되자 이란 당국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를 소집해 대응책을 논의하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고, 이번 사건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이란 이슬람공화국 영토에서 발생한 쓰라린 사건과 관련해 그의 피 값을 치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지시했다. 신정(神政) 체제에서 ‘알라의 대리자’인 최고지도자가 한 말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보복 공격은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앞서 이란은 지난 4월 시리아 주재 영사관이 이스라엘에 폭격을 입자 같은 달 이스라엘 본토에 대규모 드론과 미사일 수백 발을 날렸다. 이스라엘이 보복에 나서긴 했지만, 당시는 제한적인 충돌에 머물렀다.
헤즈볼라-이란 단계적 공격 시나리오 거론
다만 하니예 암살 직후 하루 이틀 새 이란이 보복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으나 암살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만큼 이에 상응하는 강도로 이스라엘에 보복하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 모하마드 나에이니 이란혁명수비대 대변인은 국영 IRIB 방송에 “이란의 대응은 이전 작전과 다를 수 있다”며 “경험이 풍부한 이란군은 적을 능숙하게 처벌할 수 있으며 성급한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스라엘과의 확전에 부담을 갖고 ‘상황 관리’에 나섰다는 관측도 나온다.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은 이스라엘에 선을 넘는 피해를 입혔다가 자칫 그토록 아끼는 핵 시설을 이스라엘이 전면적으로 공습하는 명분을 줄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간접적 방법으로 서방에 타격을 입히려는 정황도 포착됐다. 미 전쟁연구소(ISW)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란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중재 당사국인 이집트·카타르 등과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알리 바게리 이란 외무장관 대행은 바드르 압델라티 이집트 외무장관과 통화한 것으로 전해졌고, 앞서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교부 장관과도 통화했다.
이처럼 막후에서 휴전 협상 중재국과 물밑 대화에 나선 것은 ‘저항의 축’이라 불리는 반(反)이스라엘 단체 하마스·후티·헤즈볼라를 이란이 지원해온 만큼 휴전 협상 결과에 따라 자국 정세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란 역시 내심 휴전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자국 입장을 중재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에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스라엘 매체 유대뉴스연합은 “하니예를 노린 표적 암살은 이스라엘이 이란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양측이 전면전을 불사할 경우 이란이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난도 이란의 보복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란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탈퇴로 핵합의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고 제재가 강하되며 국민 생활고가 가중됐다. 새로 취임한 개혁 성향의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서방과의 핵합의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보복 개시보다는 상황 관리에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자제 촉구 위한 국제사회 총력 외교전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에 대비해 군 경계태세를 최고로 끌어올린 상태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수석대변인은 성명에서 “우리는 공격과 방어에서 최고 수준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역시 중동 지역 해·공군 전력을 증강하며 대응 태세를 강화했다. 미 국방부는 “로이드 오스틴 장관이 핵추진 잠수함 USS 조지아호의 중동 배치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오스틴 장관은 중동으로 이동 중인 에이브러햄링컨항모 타격 전단의 항해를 가속할 것도 지시했다. USS 에이브러햄링컨에는 F-35C 제트 전투기가 탑재돼 있다.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의 브라이언 피누케인 미국 프로그램 수석고문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항공모함은 종종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힘과 헌신을 과시하거나 미국의 지역적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된다”고 분석했다.
한편 국제사회는 이란의 군사행동 자제를 위한 전방위 설득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정상과 통화한 뒤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이란이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공격 위협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중동에 급파했다. 블링컨 장관은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난 뒤 이스라엘이 미국의 가자 전쟁 휴전안 조건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하마스는 “최근 우리가 제시받은 (휴전 관련) 내용은 지난 7월 2일 바이든 구상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기반으로 당사자들이 도달한 방안을 뒤집는 내용”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아 협상 재개 여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편 아모스 호치스타인 미국 백악관 중동 특사도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레바논 베이루트를 모두 방문하며 양측의 자제를 촉구했다.
중동 확전을 막기 위한 주변국들의 외교 총력전에도 이스라엘과 레바논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도 지속되고 있다.
이란과 헤즈볼라가 휴전 협상이 이뤄지는 동안 본격적인 보복을 잠시 미루고 있지만, 헤즈볼라는 협상 결과와 관계없이 여전히 보복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헤즈볼라의 2인자 나임 카셈은 지난 8월 15일 이스라엘에 대한 대응은 가자 전쟁과 “완전히 별개”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휴전이 성사된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다른 군사 작전은 중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