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공정한 선수 선발 원칙으로 잡음 차단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올림픽 전 종목 석권 신화 이끈 금빛 동행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포함해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휩쓸며 역대 최고 성과를 거둬 대한민국 스포츠의 새로운 신화를 썼다. 지난 2016 리우 올림픽에서 4개 전 종목 석권을 달성한 이후, 이번 대회에서는 2021 도쿄 올림픽부터 추가된 혼성 단체전까지 포함해 5개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내 단일 종목 스포츠 단체 최장 기간 후원
양궁 역사를 바꾼 한국 대표팀의 대기록은 선수와 코칭스태프들의 땀과 피나는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강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한계를 넘어서는 치열한 훈련을 통해 다시 한 번 최고의 위치에 우뚝 선 모습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줬다. 이번 대회를 통해 ‘여자 양궁 단체전 10연패’라는 위업과 남자 대표팀의 김우진은 통산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하며 동·하계를 통틀어 역대 최다 금메달을 따낸 한국 올림피언으로 우뚝 섰다.
여기에 대한양궁협회 정의선 회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진정성 있고 꾸준한 지원도 큰 힘이 됐다. 현대차그룹은 1985년부터 40년 가까이 한국 양궁의 성장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이는 국내 단일 종목 스포츠단체 후원 중 최장 기간 후원이다. 1985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했으며, 2005년부터는 정의선 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을 연임하고 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정 회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차그룹의 맞춤형 지원은 한국 양궁에 큰 힘을 불어 넣었다. 선수들의 체계적인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양궁 경기가 열린 앵발리드 경기장과 똑같은 시설을 진천선수촌에 건설했고, 현지에서 예상되는 음향과 방송 환경 등을 적용해 모의대회 역시 진행했다. 전북현대모터스와 협의해 전북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소음 적응 훈련도 진행하기도 했으며, 남한강변에서 파리 센 강의 강바람을 대비한 훈련도 했다.
여기에 앵발리드 경기장에서 약 10여km 떨어진 곳의 스포츠클럽을 통째로 빌려 양궁 대표팀을 위한 전용 연습장을 마련했다. 휴식과 훈련을 위한 시설들이 갖춰진 곳으로,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통상적인 출국 날짜보다 4일 정도 빨리 출국해 전용 연습장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하며 시차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훈련장 인근에는 별도의 휴게 공간을 마련해 틈틈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곳에서 양궁선수들을 위해 구성한 식단을 토대로 프랑스 내 한식 케이터링 업체를 선정해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도 제공했다.
대회 기간 선수들이 안정적인 심리상태와 높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스포츠심리 전문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까지 동행하도록 했다. 선수들은 한국에서 훈련할 때부터 전문가들로부터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할 때 호흡 및 명상으로 긴장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훈련과 함께 심리적인 고충에 대한 상담을 받았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연구개발(R&D) 역량을 활용해 훈련 장비와 훈련 기법을 개발해 지원해왔다. 이미 지난 도쿄 올림픽 직후부터 프로젝트에 착수해 선수들과 코치진을 심층 인터뷰하고, 훈련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청취했다. 대표적인 것이 ‘개인 훈련용 슈팅로봇’이다. 실시간 제어 소프트웨어와 풍향 및 온습도 센서가 탑재된 슈팅 로봇은 외부 환경 변수를 측정한 후 조준점을 보정해 평균 9.65점 이상의 높은 명중률을 보인다. 상대 선수가 없어도 언제든 1대1 연습이 가능한 훈련 파트너가 생긴 셈이다. 바람에 따른 영향 외에는 오차 요소가 거의 없는 슈팅 로봇과의 훈련은 선수들의 실전 감각 유지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 양궁 관계자들의 평가다.
이외에도 자세가 선수 성적에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기존 훈련용 카메라 장비를 개선한 ‘야외 훈련용 다중카메라’도 새롭게 만들었다. 이 카메라는 머리 위와 정면의 2개의 각도에서 선수를 촬영한 영상을 모니터에 분할 출력해 선수가 자신의 슈팅 자세를 여러 각도로 모니터링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실제 선수의 동작과 피드백 영상 간 시차를 0∼9초로 설정하고, 천천히 보기 기능을 지원해 정밀 분석도 가능하다. 여기에 어디에서든 활 장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휴대용 활 검증 장비’와 직사광선을 반사하고 복사에너지 방출을 극대화하는 신소재를 개발해 적용한 ‘복사냉각 모자’를 지원했다. 그리고 3D 프린터로 선수의 손에 최적화해 제작한 ‘선수 맞춤형 그립’, 비접촉 방식으로 선수들의 생체정보를 측정해 선수들의 긴장도를 파악하는 ‘비전 기반 심박수 측정 장치’, 최상 품질의 화살을 선별하는 ‘고정밀 슈팅머신’ 등을 대회 준비 과정과 실전 경기에서 양궁 대표팀과 코치진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이처럼 현대차그룹은 지원은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하되 대표 선수 선발이나 협회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투명성과 공정성만은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인해 양궁협회에는 파벌로 인한 불합리한 관행이나 불공정한 선수 발탁을 찾아볼 수 없다. 초·중·고 학생선수들이 유소년대표(초)와 청소년대표(U16)를 거쳐 후보 선수(U19), 대표상비군(U21), 국가대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수십 년에 걸쳐 우수 선수 육성 시스템을 체계화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장한 자원들을 철저하게 실력 위주의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뽑아 국제무대에서 경쟁하게 했다. 2020 도쿄올림픽과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1년 연기됐을 때는 대표 선발전을 다시 치르는 결단을 내릴 정도였다. 명성이나 이전 성적보다는 현재의 성적으로만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기록경기에서 성적 위주의 대표선발 원칙을 사수해온 것이 한국양궁이 40년 이상 승승장구한 비결일 것”이라며 “그걸 지키지 못하면 한국양궁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진도 파리에서 외국 기자들이 한국양궁이 강한 이유를 묻자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모든 선수가 동등하게 경쟁한다”고 대답했다.
대담성·혁신성·포용성 담긴 정의선 리더십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리더십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모빌리티 업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인인 정 회장이 자신의 기업 경영 방식을 스포츠에 결합해 한국 양궁이 최고의 성과를 내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올해로 20년째 단체를 이끌고 있는 정 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양궁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고,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며 양궁인들과 사려 깊고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신뢰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한국 양궁 60주년을 맞이했을 때 정 회장은 “운동장의 빛이 안 드는 곳에 계신 분까지 모두 챙기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정 회장은 개막 이전부터 직접 준비 과정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올림픽 개막식 전 미리 현지에 도착해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양궁 경기 기간 내내 현지에 체류하며 선수들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주요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양궁협회 관계자, 프랑스 현지 교민들과 선수들을 직접 응원했으며 한국 여자 양궁이 올림픽 10연패를 달성하자 직접 시상자로 나섰다.
정 회장은 평소에도 선수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정신적인 멘토 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기간이 아닌데도 종종 선수들과 만나 식사를 하고, 블루투스 스피커, 태블릿 PC, 마사지건, 카메라 등을 선물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지원에 대표 선수들은 메달 획득 시 정 회장에게 달려가거나 직접 메달을 걸어주며 감사함을 표했다. 여자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한 후 임시현은 “한국 양궁 대표팀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은 정의선 회장님이다. 정의선 회장님이 많은 지원을 해주셨기 때문에 저희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회장님은 저희한테 진짜 너무 고생 많으셨다고 해주셨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정 회장은 이번 성과를 선수들의 몫으로 돌렸다. 그는 “일단 우리 선수들께 제일 고맙다. 선수들이 꿈꾸는 걸 이뤄서, 선수들 본인이 가진 기량을 살려 이 모든 걸 이뤘다는 게 제일 기쁘다”며 “처음부터 전 종목 석권이나 금메달 수를 목표로 한건 아니었다. 협회나 저는 선수들이 노력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할 수 있도록 도운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룹 경영을 미뤄두고 올림픽 기간 내내 협회를 현장에서 이끄는 열정을 보인 그가 완벽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는 길에 협회 집행부에 한 말은 “내일부턴 2028년 LA올림픽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도쿄 올림픽이 끝난 날 “이젠 파리올림픽을 준비하자”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 회장의 진심, 철학, 원칙과 이에 대한 현장의 공감, 역할의 균형이 더해져 만들어진 신뢰가 있어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위상도 당분간은 굳건히 지켜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