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조금 등 정부 지원 필요하다는 지적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전기차 ‘캐즘(Chasm)’에 직격탄 맞아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일시적 수요 정체를 뜻하는 ‘캐즘(Chasm)’ 장기화 속에 중국 경쟁업체의 급성장으로 국내 배터리 업계의 혹한기가 길어지는 분위기다. 올해 1분기 전방산업인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 둔화에 씁쓸한 실적을 거둔 K-배터리 3사는 2분기에도 수익성 개선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수요 정체 장기화 우려에 중국 급성장 ‘위협’
전기차 시장이 ‘캐즘’에 접어들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타격을 입고 있다. 전기차 수요 부진으로 핵심 광물 가격이 떨어지며 배터리 판매가가 동반 하락한 영향이다. 고금리에 전기차 구매 보조금 축소가 더해져 전기차를 구매하려는 이들의 부담도 커졌다. 올해 하반기부터 시장 상황이 개선될 것이란 이야기가 들리지만 업계는 수요 둔화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 한국 배터리 3사는 올해 1분기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결 기준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1,953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57.6% 감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공시했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상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에 따른 공제액을 제외하면 2천,525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셈이다. 삼성SDI의 1분기 영업이익은 2,207억 원으로 전년 동기(4,502억원) 대비 50.1% 줄었고, SK온은 3,31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10개 분기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배터리 기업들의 실적 악화 원인은 핵심 소재 가격이 떨어져서다. 원가가 하락하면 부담이 줄 것으로 보이지만 원재료 투입 후 실적까지 시차가 걸리는 ‘역래깅 효과’가 발생해 되려 손해를 본다. 배터리 사들은 광물 가격과 배터리 판매가격을 연동해 고객사와 납품 계약을 체결하는데, 리튬 가격이 하락하면 저렴한 가격에 배터리를 납품해야 해 이익 감소가 불가피하다. 그 핵심 수익 지표인 리튬 가격은 하락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배터리 3사의 올해 2분기 실적도 악화할 전망이다.
업계에선 캐즘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전기차 가격을 비롯해 고금리와 미흡한 전기차 충전 시설, 전기료 상승, 내연기관 대비 비싼 보험료 등 복합적인 요인이 캐즘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다. 더욱이 제너럴모터스(GM)가 올해 전기차 생산량을 기존 20만∼30만대에서 20만∼25만대로 하향 조정하는 등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더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충전 인프라 보급 속도가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도 캐즘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데 비해 충전 시설은 충분하지 않아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한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급성장도 위협적이다. 이들 기업들은 풍부한 핵심광물 자원을 기반으로 공급망을 수직 계열화해 가격 측면에서 강점을 갖췄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5월 배터리 총사용량 집계에서 글로벌 1, 2위 모두 중국 업체가 차지했다. 중국 CATL과 BYD의 합산 점유율은 50%가 넘는다. 그 뒤를 이어 국내 배터리 3사가 3∼5위에 자리했다.
완성차 기업 생산 계획 변경으로 배터리 기업에도 영향
호황기에 막대한 투자를 발표했던 배터리 기업들은 이로 인해 투자 계획을 축소·연기하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생산 계획을 변경하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도 영향을 받는 것이다. 포드의 경우 캐나다 공장에서 생산할 3열 스포츠유틸리티(SUV) 전기차 출시를 2025년에서 2027년으로 연기했고, 제너럴모터스(GM)는 올해 중반까지 전기차 누적 생산량 40만대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철회하며 2035년까지 신차를 모두 전기차로 출시하겠다는 계획도 폐기했다. 폭스바겐그룹은 전기차 라인업 ID 시리즈 판매 부진이 이어지면서 독일 공장 가동률을 낮췄다. 메르세데스 벤츠도 전기차 판매 비중 확대 계획을 5년 연기하고 내연기관 모델을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전기차 시대에 대비해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방향성은 유지할 방침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중국 업체들의 ‘텃밭’으로 불리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대규모 수주에 성공하며 반격에 나섰다. 보급형 전기차가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LFP 배터리 채택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LG에너지솔루션은 시장 수요에 따라 르노의 차세대 전기차 모델에 LFP 배터리셀을 탑재하는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중국 기업이 독주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도 추격 중이다. 삼성SDI는 미국 최대 전력기업인 넥스트에라에너지에 1조 원대 규모의 ESS용 배터리를 납품하는 것으로 전해졌고, LG에너지솔루션도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 미국법인과 총 4.8GWh 규모의 ESS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주의 ESS LFP 배터리 전용 생산 공장 건설을 착공 두 달 만에 일시 중단했다. 유럽과 미국 미시간주 공장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전기차용 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함에 따라 ESS 전용 공장의 필요성이 시급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SK온의 경우 포드와 합작 투자 중인 블루오벌SK 켄터키 2공장 가동 시점을 기존 2026년에서 ‘2026년 이후’로 연기했다.
한편 배터리 업계는 미국 대선 결과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조 바이든 정부가 추진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동력을 잃을 수도 있어서다. 앞서 미국은 중국산 저가 전기차와 배터리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을 내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배터리 3사는 AMPC 덕을 톡톡히 봤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1분기 AMPC 혜택을 1,889억 원으로 산정했다. 잠정 영업이익은 1,573억 원으로 AMPC를 제외하면 사실상 316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1분기 기준 삼성SDI는 467억 원, SK온은 385억 원을 각각 AMPC로 받았다.
이처럼 국내 배터리 3사의 AMPC 의존도가 큰 만큼 IRA 수정 시 우리 기업들에게 미칠 영향도 적잖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산업연구원의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한국 배터리 산업 리스크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IRA가 한국 배터리 기업의 미국 시장 판매량을 최대 26% 증가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연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할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미국의 배터리산업 육성 정책이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미국 내 배터리 수요가 둔화될 것이고, IRA에 지원이 약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여 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프라 보급에 집중 투자해 캐즘 극복에 성공한 중국의 사례도 살펴볼 만하다. 중국 정부는 자동차 산업 굴기의 일환으로 전기차 충전기 보급에 주력했다. 중국 전력기업연합회(CEC)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중국의 전기차 충전기는 92만개로 세계 최대 규모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노력은 전기차 보급을 늘렸는데, 중국승용차협회는 중국의 신재생에너지차 점유율이 올해 44%에서 2026년 50%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기술력을 키우고 일본은 기술 주도권 지키기에 사활을 걸고 나서면서 ‘기업 대 기업’ 싸움만으로는 시장 부진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핵심 공급망 다변화와 차별화된 기술력 확보를 위한 R&D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고체 등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의 시장 선점을 위한 보조금 등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