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사로 입지 굳혀와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흙수저’ 출신 미혼모서 영국 2인자까지
영국 총선에서 14년 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총리가 공식 취임했다. 보수 집권당 심판론 속에 압도적 여론의 지지를 발판으로 국정의 키를 쥐게 됐지만, 그만큼 변화를 바라는 민심의 요구에 부응하며 집권 능력을 입증해야 할 시험대에 올랐다. 스타머 총리에게 주어진 과제만큼 화제를 불렀던 건 내각 구성이었다. 다름 아닌 앤절라 레이너 부총리 인선 때문이다.
노동당 내 강성·중도 좌파 세력 연결 역할
부총리 겸 균형발전-주택 및 지역사회 담당 장관으로 임명된 앤절라 레이너의 전형적인 영국 엘리트 정치인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레이너는 1980년 그레이터맨체스터주의 스톡포트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어머니는 읽고 쓸 줄을 몰라 집에 책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열 살 때부터 돌봤다. 문맹이던 어머니 때문에 개 사료를 먹을 뻔한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 난방이 자주 끊기는 공공주택에서 양극성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며 종종 자신의 처지에 분개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탈선을 일삼았고, 열네 살 무렵엔 매일 밤 나이트클럽을 드나들었다. 열여섯 살에 임신하면서 학교를 자퇴했다.
그가 아이를 낳은 1997년은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출범한 해다. 저소득층 자녀의 육아를 지원하는 교실이 열렸고, 레이너는 1기생으로 이 혜택을 받았다. 스톡포트 대학에서 수어를 배우고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해 취업에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노동조합 간부를 맡으면서 노동당에 입당해 간부를 거쳐 20만 명을 대표하는 위원장직에 오른다.
본격적인 정치 입문 후 레이너는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의 인생 전기를 마련해 준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맨체스터 애슈턴언더라인 선거구에서 당선했다. 이 선거구에서 여성 의원이 나온 건 180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노동당이 야당이던 시절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렸다. 원내 입성 후에는 강성 좌파였던 제러미 코빈 전 당대표의 신임을 받아 예비 내각의 연금장관으로 임명됐고, 중도 노선을 추구하는 스타머 대표와는 초기에 다소 갈등도 있었지만 지금은 인정받는 동료가 되었다. 2017년에는 첫아들이 딸을 품에 안아 37세의 젊은 나이로 할머니가 됐다.
키어 스타머 총리 강력한 라이벌 될 수도
레이너는 2020년 노동당 부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2위 경쟁 후보와 두 배가 넘는 표 차이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높은 인기를 증명했다. 특유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사로 지지 세력을 모으며 부대표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치안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강경파여서 “경찰은 테러리스트에게 총을 먼저 쏘고, 질문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년 시절 반사회적 환경에서 받은 고통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분석한다.
그는 노동자 출신이란 점을 숨기지 않는다고 한다. 속기사들에게 연설문을 매끄럽게 수정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잘못된 문법조차) 그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영국의 정치 전문지 뉴스테이츠맨은 그녀를 2023년 영국 좌파 정치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8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레이너 부총리의 성장기와 높은 인기는 이번 총선에서 스타머 총리의 노동당이 14년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하며 압승을 거두는 데 도움을 줬지만, 이후 스타머 총리의 입지를 위협할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실제 스타머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가져오며 압승을 거뒀으나 전국 득표율에서는 유권자의 3분의 2 가량이 노동당이 아닌 다른 당을 뽑은 것으로 드러나는 등 이번 승리가 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보수당에 대한 반발로 이뤄진 표심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더욱이 스타머 총리의 눈앞에는 이민자 증가와 세금 인상, 경기 침체 등의 과제도 산적해 있어 국민들이 신임 총리에게 높은 지지율을 보내는 ‘허니문’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내 인기가 높고 개인적인 야망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레이너 부총리는 스타머 총리의 권위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일 수 있는 것이다. 현지 언론 텔레그래프는 이번 노동당 내각 구성원 중에 몇몇은 스타머 총리의 입지가 약해질 경우 레이너 부총리 쪽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있다면서 노동당 내부에는 레이너 부총리가 언젠가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또한 최근 여론조사기관 사반타의 조사에 따르면 레이너 부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을 찍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스타머 총리의 후임으로 가장 지지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