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리더십 Ⅰ] 관점 따라 달라지는 지도자 평가
[지도자와 리더십 Ⅰ] 관점 따라 달라지는 지도자 평가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2.08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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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관점 따라 달라지는 지도자 평가

시대마다, 계층마다 다각도로 보는 안목이 필요 

▲ⓒ국립고궁박물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고조선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졌다. 누군가에는 성인군자였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군이었던 역사 속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재조명 된 폭군, 광해군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왕이 있다. 인륜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묘호(廟號)도 갖지 못한 광해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앉히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대북파의 지지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영창대군은 살해당했고,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이 주장한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여기에 광해군은 명과 후금간의 대립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사대부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명요동도지휘사차’에 따르면 광해군은 파병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파병 군사의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라는 비밀 교지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후금이 우세한 것을 목격하곤 후금에게 항복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광해군의 시대로 끝이 났다. 당시 광해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위와 명나라와의 신의를 저버린 일은 유교사상을 중시한 사대부에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묘호를 갖지 못했고, 그가 적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군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쓴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는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패한 군주이며, 백성을 철저하게 수탈한 혼군’이라고 주장했다.
 

  오항녕 교수가 광해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면, 한명기 명지대학교 교수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를 이끌고 근왕병을 모집해 민심을 수습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광해군은 저지른 실정에 대해 광해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의 정치적인 위기 인해 비롯됐다’며 광해군을 옹호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는 중립외교에 대해 ‘광해군의 혜안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병력이 약해진 명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왕권강화를 위해 궁궐 건축에 많은 백성들을 동원해 그들의 노동력이 착취되기도 했지만, 대동법을 실행해 농민들의 공물에 대한 부담을 덜어줬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조세로 바치는 제도인데, 문제는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져 공물의 페단까지 이르렀다. 이에 호조참의 한백겸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이 광해군에게 재청해 1608년 5월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했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됐다.

 

 

현대에도 각기 다른 지도자 평가 

 

이처럼 한 인물을 두고 달라지는 해석에 대해 이동진 경북대학교 교수는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현대인의 시각으로 지도자를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 지도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황도 살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지배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전했는데, 역사 속으로 파고들수록 민중이 직접 내는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달리 현대에 가까울수록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에 대한 평가만큼의 여전히 제각각이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친일파 군인으로 과거 독립군을 잡으러 다녔던 박정희 대통령만 하더라도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주도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헌법 선언 등을 통해 17년간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이들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박정희는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해 독립군 싸웠다. 뿐만 아니라 1965년 6월 22일 민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진행했고, 이로 인해 일본에게 제대로 된 피해 보상 요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동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의 공로가 크다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80년대 산업화를 이룰 순 있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혹자에겐 경제 산업 성공으로 경제개발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이에겐 희생만을 강요한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간혹, 국민에게 질타를 받은 지도자들은 ‘나의 업적은 후손들이 평가할 것이다’라 말한다. 현재의 실책이 미래에는 신의 한수일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지금의 평가도 지도자에 대한 평가 중 하나다. 이 같은 사실을 잊어버린 채 후대의 긍정적인 평가만을 바라는 지도자가 과연 옳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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