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서방 정서와 침략 잦았던 역사도 푸틴에 힘 실어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독재 체제 공고히 한 ‘21세기 차르’
지난 3월 15일~17일까지 치러진 러시아 대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의 압도적인 승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24년 전만 해도 가난한 집안 출신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스파이가 러시아를 30년간 통치하는 ‘21세기 차르’로 등극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는 거의 없었다. 푸틴은 소련 붕괴 후 휘청이던 러시아를 일으켜 세운 지도자라는 평가와 권위주의로 장기 집권하는 ‘스트롱맨’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반서방 집결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6년을 더 맡겼다. ‘강한 러시아’를 강조한 푸틴 대통령은 88%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5선 고지에 올라섰다. 옛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이다. 푸틴 대통령은 승리 연설에서 “누가 얼마나 우리를 위협하고 싶어 하든, 누가 얼마나 우리와 우리 의지 그리고 우리 의식을 억압하고 싶어 하든, 역사상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다. 그것은 통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푸틴 대통령은 30년간 러시아를 통치하게 됐다. 옛 소련 최장수(29년)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넘어서는 지도자가 탄생한 셈이다. 1999년 12월 31일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퇴진으로 대행을 맡은 푸틴 대통령은 2008년∼2012년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올리고 총리로서 실권을 유지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0년 개헌으로 2030년에 열리는 대선까지 출마할 수 있어 이론상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정권을 연장할 수 있다. 이 경우 푸틴은 러시아제국 초대 차르 표트르 대제(43년 재위) 이후 가장 오래 러시아를 통치한 인물로 남게 된다.
권위주의적인 통치 스타일로 비판받아온 푸틴 대통령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서방은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을 시작하자 고강도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그의 통치 기반이 무너지길 기대했다. 특히 지난해 6월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전차를 끌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는 무장 반란을 일으키자 푸틴의 철옹성 같은 통제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더욱이 최근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조성된 추모 분위기도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하지만 푸틴은 보란 듯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집권 5기 시대를 열었다.
푸틴에 대한 견고한 지지는 국내에서 ‘이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에도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1991년 붕괴했다. 이후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모라토리엄’ 선언 등으로 러시아 위상을 추락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이에 푸틴은 2000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강한 러시아’ 정책을 펼쳤다. 고유가 시대에 힘입어 러시아 경제를 끌어올렸고, 석유와 가스, 식량 등 풍부한 자원을 무기로 세계 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 붕괴 트라우마가 없는 젊은 층도 경제적 안정과 질서를 우선하는 분위기다. 푸틴 대통령이 서방에 맞서는 상황을 보며 강대국의 위상 회복을 느낀다는 해석도 있다. 서방과 대립이 심화하면서 푸틴이 내세운 특별군사작전 명분에 동조하는 여론도 커졌다.
여기에 서방 제재에도 러시아 경제는 예상보다 잘 버티고 있다. 물가가 오르기는 했지만, 러시아인들은 일상에서 전시 상황을 거의 체감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데다 서방 기업이 철수한 빈자리는 병행수입 제품과 자체 브랜드로 메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년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0월 1.1%에서 지난 1월 2.6%로 상향 조정했다. 러시아 실업률 역시 지난해 10월 2.9%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푸틴 대선 압승에 서방·친러 반응 극명히 갈려
푸틴 대통령의 5선 성공을 두고 국제사회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어진 신냉전 전선이 이번 대선을 두고 더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서방은 비밀투표를 보장할 수 없는 투명한 투표함이 쓰였고, 우크라이나 내 4개 점령지에서도 투표가 시행됐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아 불법 선거라고 주장한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존 커비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푸틴이 정적들을 투옥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맞서 출마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 선거는 명백히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억압과 협박을 기반으로 치른 선거”라고 비판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러시아에서 치러진 가짜 선거는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푸틴의 통치는 권위주의적이며 검열과 억압, 폭력에 의존한다”며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에서의 ‘선거’는 무가치하고 법적 효력이 없으며 또 다른 국제법 위반 행위”라고 덧붙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도 엑스에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는 불법적으로 선거가 치러졌고, 유권자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독립적 선거감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프랑스 외무부는 “러시아의 선거는 자유롭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선거의 조건에 못 미쳤다”며 “정치적 기본권에 대한 공격에 저항해 평화롭게 반대를 표명한 많은 러시아 시민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며칠간 러시아 독재자가 또 다른 선거를 치르는 시늉을 했다”고 비난했다. 특히 푸틴 대통령을 겨냥해 “이 인물은 그저 권력에 젖어 영원한 통치를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다”며 “그는 헤이그(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친러시아 진영은 푸틴 대통령의 승리를 환영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푸틴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당신이 다시금 당선된 것은 당신에 대한 러시아 인민의 지지를 충분히 방증한다”고 축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당신의 영도 아래 러시아가 국가 발전·건설의 더 큰 성취를 반드시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역시 축전을 발송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정상회담 이후 양국 간 다방면 협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북한산 미사일 등 탄약을 사용하고 있다. 외신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오는 5월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이와 연계해 북한도 방문하며 북·중·러 결속에 더 과감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 기간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평양 방문 초대를 수락한 상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발전이 지속될 것”이라며 푸틴 대통령의 연임을 축하했고, 우크라이나와의 협상 테이블로 복귀할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튀르키예 대통령실이 밝혔다. 또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결정적 승리와 재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냈다고 이란 국영 IRNA 통신이 보도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도 푸틴 대통령에게 “성공과 번영, 더 나은 발전을 기원한다”는 축전을 보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옛 소련 영토였던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정상도 푸틴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