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 규제에 성장 멈춰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정보통신기술이 만드는 보험의 혁신
글로벌 보험사들이 정보통신기술(ICT)를 활용해 위험 관리에 투입하던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혁신된 보험 산업을 ‘인슈어테크(InsurTech)’라고 부른다. 관련 시장이 성장하면서 보험사의 비용 지출은 줄고, 이로 인해 보험료도 일부 낮아져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평가다.
글로벌 시장 규모 400억 달러 가까이 커져
미국 시장조사업체 ‘더비즈니스리서치컴퍼니’에 따르면 오는 2027년 글로벌 인슈어테크 시장 규모가 394억 4,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보험금을 받아야 할 사고가 생기기 전에 피해를 예방하는 시대까지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페이여행자보험은 최근 여행자보험 가입자에게 원격 의료 서비스를 하고 있다. 여행자보험을 보장하는 동시에 75국 의사 2만 명과 연결해 각국 언어로 진료를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보험 가입부터 원격 진료까지 모든 과정이 애플리케이션 안에서 이뤄진다.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주택보험을 판매하기도 한다. 스위스 취리히보험은 지난 5월 IoT를 활용한 보안 프로그램과 주택보험을 묶은 ‘스마트 홈’ 상품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화재와 누수, 동파, 절도 등의 손해를 보장하는 동시에 주택 관리를 스마트폰으로 가능하게 해서 피해를 미리 방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인구 대부분이 주택보험을 드는 미국에서도 사물인터넷 프로그램을 묶은 상품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집의 실내 온도와 일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해 화재 경보를 울리게 하거나 집에 설치된 카메라가 동작을 인식해 사람이 쓰러지면 자동으로 비상 연락하는 기능이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은 예상치 못한 낭패를 피할 수 있고,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액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보험사 올스테이트는 고객이 사물인터넷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주택보험료를 5~13% 할인해준다.
인슈어테크 기업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미국의 레모네이드는 ‘보험금 계산에 3초’라는 기록을 보유해 특히 주목받는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앱으로 보험금을 청구하면 ‘짐(Jim)’이라는 이름의 AI봇이 3초 만에 보험금을 계산하고 3분 만에 지급까지 마친다. 피해 관련 서류를 고객이 작성하도록 요구하는 기존 보험사들이 길게는 보름이 걸려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것이다. 그럼에도 손해율(보험료 수입 대비 보험금 지급 비율)이 78%로 미국 상위 20개 보험사 평균 손해율(82%)보다 낮아 보험사 수익성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업 효율성을 키워 보험료 역시 경쟁사 대비 68% 수준으로 낮췄다.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등장한 보험 상품도 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인슈어테크사 이글루는 기후 변화로 2050년까지 베트남 커피 수확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베트남 시장을 개척했다. 강우량이나 기온, 지진 규모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피해 규모와 상관없이 보험금을 주는 ‘기상 지수 보험’을 개발해 베트남 고원 지대 커피 농가에 판매 중이다. 스위스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과거 데이터를 학습한 뒤 항공편을 분석해 항공편 지연과 결항 피해를 보장해주기도 한다.
기술 활용해 고객 약점 잡는 사례도
한편 자연재해 보험이 주력인 미국 RCIS는 드론을 25대 보유하고 있어, 이를 활용해 자연재해로 농작물 피해가 생겼을 때 손해 규모를 평가한다. RCIS 소속 손해사정인 가운데 70여 명이 드론 조종 자격증을 갖고 있다. 손실 평가가 빠르게 끝나면 농장주도 보험금을 보다 빨리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슈어테크가 고객에게 무조건 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보험사가 보험 계약 갱신을 거절하는 구실로 삼거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반발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한 주택보험 가입자는 보험사로부터 갑작스런 보험 해지 통보를 받았다. 업체는 드론으로 그의 주택환경을 살펴본 결과 뒷마당에 매우 낡은 차와 타이어 등이 쌓여 있는 등 화재 위험이 커서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가입자는 1966년 식 자동차를 직접 수리 중이라며 그냥 방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업체는 증거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고 취소 조처에 대한 항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처럼 캘리포니아 지역 일부 보험사들이 ‘드론 정찰’을 실시한 뒤 주택보험 가입자들을 털어내는 사례가 발생 중이다. 이상기후로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탓에 보험금 지급액이 많아지자 기술을 활용해 고객의 약점을 잡는 것이다.
일부는 다른 보험사를 찾아 나서지만, 소비자가 고를 수 있는 주택 보험 상품 수가 급감해 신규 가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험업체 매틱이 대형 보험사 10곳을 조사한 결과, 지난 3월 기준 평균 2.87개의 주택보험 상품이 있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 6.08개와 비교하면 소비자의 선택 폭이 53%가 급감한 수치다. 주택소유주 1인당 가입할 수 있는 보험 상품 수 또한 지난해와 비교해서 35%나 줄어들었다.
건강보험 분야에서는 고객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화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개인정보 침해 우려가 제기된다. 중국 중안보험은 혈당 측정기로 수집된 정보를 통해 당뇨 관리를 잘하는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깎아주고 있고, 미국 보험사 빔은 가입자에게 나눠준 스마트 칫솔로 구강 상태를 수집해 치아보험 개발에 활용하기도 한다. 이는 곧 보험사가 고객의 민감한 건강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국내의 경우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으로 ‘인슈어테크’ 시장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 플랫폼을 통한 상품 비교 및 추천과 같은 서비스가 금소법 시행 이후 제동이 걸려 중단된 상태다. 규제 특례를 통해 내년 초 재개될 예정이나, 각종 제한이 추가돼 벌써 ‘효용성이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보험 비교 및 추천 서비스를 두고 연동할 수 있는 정보 범위에 대해 핀테크와 보험업권이 대립 중이다. 이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소비자에게 적합한 여러 회사의 상품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로 핀테크는 보험사에서 상품 정보를 받아 이용자 맞춤 상품을 추천한다. 그런데 보험사마다 특약 등이 천차만별이어서 정확한 보험료 산정을 위해 보험사별로 정보 제공 항목을 다르게 한 ‘개별 데이터 연동 규격(API)’을 도입하자는 게 핀테크 입장이다.
하지만 생명·손해보험협회는 개발 시간과 비용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제공하는 데이터 항목을 통일한 표준 API 방식을 고수하는 중이다. 핀테크 업계는 반쪽짜리 서비스로는 그동안 멈춘 인슈어테크 성장 동력을 살리기에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2년 전 금소법에 전자금융업자, 마이데이터 사업자(본인신용정보관리회사) 등 금융감독원 검사 대상 기관의 보험대리점 등록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되며, 국내에선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가 불가능해진 바 있다.
국내 시장 성장이 힘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해외 기업들의 성장세는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글로벌 인슈어테크 투자규모는 연평균 증가율 64% 속도로 성장했다. 특히 2021년에는 전년 대비 87% 늘어난 144억 달러의 투자금이 몰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은 특정 업계의 이권 대신 금융소비자의 권리 보호에 초점을 맞춘 정책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