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인재·동행으로 새로운 비전 제시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신경영’ 30년 철학 이을 ‘뉴삼성’의 길을 찾다
지난해 10월 승진을 통해 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년간 글로벌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휴대전화와 반도체를 이을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에 주력했다. 이와 함께 그는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은 만큼 ‘뉴삼성’으로의 도약을 위한 비전 제시도 요구받고 있다.
이건희 선대 회장 ‘신경영 선언’ 30주년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 전 세계 수백 명에 달하는 삼성그룹의 임원을 소집해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며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 선대 회장은 신경영 선언은 위기감에서 나왔다. 그는 회장 취임 5년이 지난 1993년 미국 한 가전 매장을 찾은 자리에서 삼성 제품이 귀퉁이로 밀려 먼지가 쌓인 채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뼈를 깎는 수준의 혁신만이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일갈하며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이후 삼성은 말 그대로 ‘괄목상대’했다. 이듬해 애니콜 브랜드 휴대전화를 선보인 데 이어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했다. 1996년에는 1기가 D램을 만들어 글로벌 휴대전화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최고의 품질을 지향하는 조직 문화도 이때 만들어졌다. ‘라인 스톱’ 제도가 대표적으로 선대 회장은 공장의 한 라인에서 불량 제품이 나오면 라인 전체를 멈추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1993년 불량률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로 줄었다.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 대를 소각한 ‘애니콜 화형식’이 유명한 품질 경영 일화다. 이는 과거 양(量)을 중시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질(質)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첨단 산업에서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선대 회장 역시 “양과 질의 비중을 5대 5나 3대 7이 아니라, 0대 10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삼성전자는 1993년 41조원이던 자산 규모가 448조원으로 10배 넘게 증가했고, 2022년 브랜드 가치 877억 달러를 기록하며 3년 연속 글로벌 5위에 오르는 등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본사 기준 임직원 수도 당시 47,607명에서 지난해 말 기준 12만 827명으로 늘었다. 전 세계 임직원 수는 26만6천여 명에 달한다.
회장 취임 후 현장 돌며 성장 동력 발굴 전념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는 올해 별다른 행사 없이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보냈다. 이미 이재용 회장 체재로 전환한 데다 글로벌 복합 위기 상황에서 미래 먹거리 확보에 주력하기 위한 수순으로 풀이된다. 실제 이 회장은 사면·복권과 회장 승진 이후 지난 1년간 공식으로 알려진 것만 10여 차례 해외 출장에 나서는 등 ‘광폭 행보’를 보였다. 그간 사법 리스크로 단절된 인적 네트워크를 복원함과 동시에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해 12월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한 것을 두고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미래 사업과 관련해 기대되는 시너지 효과를 고려한 출장지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실제 이 회장은 곧바로 동남아로 출장을 떠나 베트남 삼성 R&D센터 준공식에 참석하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주요 거점도 점검했다.
올해 5월에는 미국 출장에 나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 거물급 경영진들과 회동을 가지기도 했다. 미국 출장에서 이재용 회장은 ‘바이오 사업을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위해 글로벌 주요 제약사 CEO들과 잇따라 회동하며 탄탄한 신뢰를 구축했다.
이외에도 이 회장은 1월 UAE와 스위스, 3월 일본, 4월 미국, 6월 프랑스·베트남 등 대통령 해외 순방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하면서 경제 외교 선봉에 서기도 했다. 아울러 11월 말 개최지가 결정되는 세계박람회 부산 개최를 위한 물밑 지원에도 총력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활발한 현장 경영 행보를 이어나갔다. 사면·복권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삼성전자 화성캠퍼스를 방문했을 당시 사진 촬영을 요청한 한 직원의 부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웃음을 자아내는 등 격의 없는 소통으로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사업장을 방문 때마다 소통 간담회를 열어 워킹맘, MZ세대를 비롯한 직원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다. 또한 회장 취임 후 광주를 시작으로 지방 사업장을 두루 돌며 생산현장을 점검하고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해 상생의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며 상생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 지역산업 생태계 육성을 위해 향후 10년간 총 6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대표적인 CSR 사업인 스마트공장 구축을 통해 인구소멸 위험 지역에 있는 중소기업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미래 경쟁력 확보 등 과제 산적
한편 재계는 이재용 회장이 언제쯤 새로운 경영 철학을 담은 ‘뉴삼성 선언’에 나설지 주목하고 있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았다는 점과 이 회장 취임 후 새로운 시대상에 걸맞은 비전이 요구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제2의 신경영’이 발표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더욱이 반도체 등 주력 사업에 대한 위기 극복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삼성의 현주소는 ‘폭풍전야’다. 장기간 지속되는 글로벌 경기침체 속 산업 재편 가속화로 인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서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시장 주도권 싸움 벌이는 상황을 고려해 실익을 추구할 수 있는 묘책도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반도체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스마트폰 사업의 경쟁력 강화도 절실한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스마트폰 5,330만 대를 판매해 시장 점유율 1위(20%)를 기록했지만, 지난해 2분기와 비교하면 점유율이 14% 넘게 빠졌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95.5% 급감한 6,402억 원에 그쳤다. 특히 핵심사업인 반도체 부문은 4조 5,800억 원의 적자를 내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이재용 회장 역시 이러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취임 소회에서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는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재용 회장이 여러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사법 리스크’도 여전히 걸림돌로 지목된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 관련 재판으로 거의 매주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경영 활동을 위해 해외 출장에 나설 때조차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는 실정이다. 재판은 햇수로 4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이 회장만이 용단을 내려야만 가능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삼성이 정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회장은 2020년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함)’를 언급하며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2021년 이건희 선대 회장 1주기 추도식에선 “고인에게 삼성은 삶 그 자체였고, 한계에 굴하지 않는 ‘과감한 도전’으로 오늘의 삼성을 일궜다”며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새로운 삼성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가자”고 했다. ‘글로벌 삼성’의 토대를 다졌던 이건희 선대 회장의 뒤를 이어 이재용 회장이 어떤 승부수로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