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기억합니다] 재야운동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민주화의 큰 별 지다
[그를 기억합니다] 재야운동의 대부 김근태 상임고문 별세, 민주화의 큰 별 지다
  • 임성희 기자
  • 승인 2012.01.27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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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희 기자]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 2011년 12월 30일 별세했다. 그는 민주화의 큰 별로 불리며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김근태 고문의 사망원인은 파킨슨병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킨슨병은 신경계 교란으로 발생하는 병으로 김 고문은 6년 전부터 이병을 앓아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병이 김 고문이 민주화운동 당시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씨에게 당한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겼다고 알고 있다. 12월 초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김 고문은 주위에 이 사실을 알렸고 그가 민주열사로서 희생됐던 부분들이 새삼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김 고문의 영결식. 그의 죽음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이근안 씨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그를 비난했고 목사직을 수행하며 용서를 구하며 살고 있다던 그는 끝내 교계에서 면직 당했다.

 

그의 가는 뒷모습은 따뜻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故 김근태 고문. 그는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인생의 페이지를 마무리했다. 김근태 고문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재야운동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 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고, 제도정치권 입문 후에는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통한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ㆍ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 수배됐다. 이때부터 1979년 10·26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의 김근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는 이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스스로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그의 고문사실은 1985년 그의 부인 인재근 씨에 의해서 폭로됐다. 김 고문의 바깥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인재근 씨는 “고문 사실을 알고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그녀는 김 고문과 함께 1987년 악몽 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 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94년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고문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 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반면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은 당직을 맡지는 못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재야 및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라는 세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2010년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12년 총ㆍ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고문은 작년 12월 말 건강이 악화돼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고 전했다. 인재근 씨는 “제가 제일 하고 싶은 말은, 그 분이 가시는 길에 외롭지 않게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특히 아이들 손잡고 오신 엄마들 감사드립니다”라며 프레시안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근태 고문 영결식에 참석해준 많은 시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그렇다. 비록 김 고문은 차가운 고문실에서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에게는 그의 민주화의 씨앗으로 무럭무럭 자란 후세대들이 있었고 그가 가는 길에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따뜻함을 모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근안을 용서하는 건 신의 영역”이라며 말문을 닫았던 그

이근안은 고문 혐의로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경찰 재직기간 매번 특진으로만 고속 승진했고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이 중에는「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고 지난 81년에는 서울대생들의 무림사건 해결에 공을 세워 내무부장관 표창, 82년에는「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86년 경찰의 날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공·공안 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근안은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지난 88년 12월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또한 이근안은 79년 남민전사건, 81년 전 노련 사건, 85년 12월 납북어부 김성학 씨 간첩조작 사건, 86년 반제동맹사건 관련 피의자를 고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98년 10월 서울고법 형사2부가 납북어부 김성학 씨 등이 낸 재정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2013년까지 그의 공소시효가 연장됐으며, 12년째 검·경의 수배를 피해 도피해오다 1999년 10월 28일 검찰에 자수했다. 그는 2000년 9월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의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그가 여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우연히 김근태 고문과 만날 수 있었다.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 씨는 “이근안이 여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잠깐 면회를 갔는데 사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근태 씨 눈에는 사죄하는 모습으로 안 비쳤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본인도, ‘이것은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굉장히 괴로워했고, 갔다 와서 며칠 저한테 말을 안했다. 사실 바깥 얘기도 잘 하고 그러는 사람인데,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안 해서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심적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용서가 안 되는데, 용서했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갈등을 하신 것 같다”며 “나중에 얘기하는데, 자기 고민을 누군가에게 말한 것 같다. 그래서 (김근태의 고민을 들은 사람이) ‘당신이 고민할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니 신에게 맡겨라’ 그렇게 조언을 해 준 것 같다”고 전했다.(출처 프레시안 인터뷰) 2006년 11월에 출소한 이근안은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거듭난다. 2005년 김 고문이 이근안을 찾아가 역사적 용서를 했다고 하지만 상기 인재근 씨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와 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들끓는 여론에 이근안 목사직 면직

2010년 2월 이근안은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기술자가 맞다”며 전기고문 등 고문수사 행위를 전면 부인하고 자신의 고문행위를 ‘예술’이라고까지 표현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근안 씨는 김 고문의 영결식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용서받은 자의 모습도, 목회자로서의 도리도 보이지 않았다. 여론이 매섭게 그를 몰아붙이자 그는 1월 11일 과의 인터뷰에서 “김 장관과 만났을 때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그랬더니 딱 끌어안으면서 ‘그게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것이지, 저도 그만한 아량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 평생 잊지 못한다. 참 소중한 기억이다”라며 故 김근태 고문이 여주교도소로 자신을 찾아와 자신을 용서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평생 한을 지고 살고 있다. 내가 고문했던 것들이 괴롭지 않으면 목사가 되었겠나. 젊은 혈기에 상사가 시키는 일이 애국인 줄 알고 물불 모르고 했던 결과가 이제 송두리째 내가 안고 가는 멍에가 됐다. 그 수모를 내 가족이 함께 받아서 너무 고통스럽다. 둘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죽었고, 셋째 아들은 재작년에 막노동을 하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셋째 아들은 내가 고문기술자라고 낙인찍히자 대학도 그만두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금은 아내가 폐지를 주워서 생활하고 있다”있다며 주위의 동정을 호소하기도 했다. 목사자질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근안 씨는 결국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지난 1월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근안 씨에 대해 목사직 면직 판결을 내렸다. 합동개혁총회 교무처장 이도엽 목사는 19일 “교단은 이근안 씨가 목사로서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으며 겸손하게 선교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다고 판단해 이 같은 징계를 내렸다”며 “한 번 면직이 되면 복직은 불가능하며 이근안 씨도 아직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이제 평생 고통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소풍을 떠난 故 김근태 고문. 그가 뿌린 희망의 씨앗이 많은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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