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黨 정치 I] 대한민국 정치사 속 3당 정치
[三黨 정치 I] 대한민국 정치사 속 3당 정치
  • 이민성 기자
  • 승인 2016.06.0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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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이민성 기자]


 

국내 정치 변화의 초석이 된 3당 정치

민주정치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노력이 필요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에서 한국은 여소야대와 3당 체제라는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맞았다. 국내 정치사 속에서 여소 야대 현상, 특히 3당 체제는 13대 총선이 진행됐던 1988년 이후 두 번째로 이번 3당 체재는 28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에 전문가들이 새로운 3당 정치가 만들어낼 다양한 결과들을 예측하며 13대 총선 당시 첫 번째 3당 체제와 국내 정치의 흐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제6공화국, 대선, 그리고 최초의 3당 체제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진 1948년 이후 국내 정치계는 40년간 헌법이 5번 바뀌는 등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실각하며 독재 정치가 끝을 맞이하자 여야의 합의로 개정된 현행헌법에 따라 제6공화국 체제가 시작됐다. 1987년 12월 16일 이루어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시행되며 ‘10월 유신’ 이후 16년 만에 이루어진 첫 번째 대선은 기존의 선거들이 양당 주요 경쟁자들의 직선이나 단독후보의 간선과 달리 4명의 후보자의 경쟁으로 진행됐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대선주자는 12·12 군사 반란의 주역으로 알려진 노태우와 대표적인 민주인사로 알려진 양김(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5·16 쿠데타의 주요인물인 김종필 등으로 알려졌다. 당시 1961년부터 이어져 온 군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에 전문가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가 이루어질 경우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권진영의 두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로 끝나며 김영삼 후보가 28%, 김대중 후보가 27%의 득표율을 양분했다. 이에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으로 최종 당선됐다. 

 
대선 결과에 따라 신군부의 연장이라는 평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6개월 후 진행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최초의 3당 체제라고 불리는 결과를 나타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진행된 1988년 13대 총선은 당시 대선에 출마했던 4명의 정치인이 정당 의석을 나누는 결과로 이어졌다. 총선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은 당시 125석을 획득했지만,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이 70석, 제2야당 통일민주당이 59석,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획득했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국내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현상이 일어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13대 총선 결과는 여소야대 현상을 통한 민주세력의 정권 획득을 통해 국내 최초 3당 체제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통령 선거와 달리 실제 국민의 지지가 투표라는 결과로 나타나며 당시 선거 결과에서 4당 체계가 뚜렷해지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당 의석수에 위기감을 느껴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정국을 안정화 할 방안을 모색했다. 대선 당시 투표결과에서 김대중을 앞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에 밀리며 제3당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김영삼이 14대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2, 3야당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를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설득 후 ‘3당 합당’을 통한 219석의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물로 등장한 민주자유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하 신군부 세력이 맞이한 여소야대를 해소해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 또한, 경상남도에서 지지받는 통일민주당과 충청권에서 영향력을 지닌 신민주공화당의 합류는 노태우의 민주자유당이 수권 여당으로서 높은 지지율을 얻은 배경이 됐다. 

 
 

양김의 경쟁에 나타난 ‘불편한 동거’ 3당 합당


13대 총선 결과에 따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은 정국주도권을 지닌 야3당에 기존 집권당들이 획득했던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놓쳤다. 전문가들은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의석수에 비례해서 분배받는 것으로 의석이 부족했던 민주정의당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했다. 1988년 7월 2일 국회 본회의에 정부가 제출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야당에 의해 부결되는 일이 발생했으며 국정감사가 재등장했다. 국정감사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비상계엄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며 제9대 국회부터 제12대 국회까지 진행되지 것으로 알려졌다. 정국주도권을 야당에 넘겨준 상황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통해 정치 사안별 협조를 구할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야당과의 정치 충돌로 인해 정국수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야당과 연합해 합당을 통한 문제점 해결을 구상한 노 전 대통령은 과반수 의석 확보와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접근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각과 달리 정치적 출생과 방향성이 다른 두 정당의 결합은 어려운 부분이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에 어려움을 느낀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에 접근했다. 신민주공화당은 군부정권의 후신인 김종필 총재가 대표로 활동한 만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하지만,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과 같은 별개의 정당으로 민주정의당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대선과 총선을 통해 굳어진 지역 구도로 14대 대선이 진행될 경우 부산과 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했다. 정치학자들은 당시 13대 대선 실패로 인해 김영삼 총재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김영삼 총재는 민주정의당과 방향성이 다르다는 당내 의견은 물론 지역 주민의 비난을 무릅쓰고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합당을 결심했다. 또한,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더이상 대권 도전이 힘들다는 판단에 내각제 개헌을 제시한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에 찬성했다. 이에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며 ‘3당 합당’이 완성됐다. 세 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초대 총재로 취임하며 219석의 의석으로 정국주도권을 탈환했다.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은 충청권역의 지지를 받던 신민주공화당과 경상도의 지지를 받는 통일민주당의 합류로 호남권을 제외한 전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3당 체제 이후 국내 정치의 변화 그리고 남겨진 문제점


민주자유당이 합당을 통해 정권을 탈환했지만, 1992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각 당의 낙천자들을 영입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며 14대 국회에서도 3당 체제는 이어졌다. 통일국민당의 등장에 보수층의 지지가 이탈하며 민주자유당의 짧은 국회 독재는 선거 후 149석으로 과반 획득에 실패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제14대 총선 결과 97석을 획득한 김대중의 민주당과 31석을 얻어 원내 교섭단체를 획득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이 민주자유당의 독주를 차단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은 각 당의 계파인 민주계(통일민주당), 민정계(민주정의당), 공화계(신민주공화당)의 지속적인 갈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이 격화되자 김종필은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후 계파 갈등으로 탈당한 공화계 인사들을 주축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민주자유당은 공화계의 탈당과 함께 비자금 문제, 광주학살 등의 혐의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교도소에 수감되자 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은 이러한 혼란한 정국을 틈타 민주자유당에서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 세력을 몰아내고 당을 장악해 대선에 승리했다. 14대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창당하며 제14대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이후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을 거쳐 현재의 ‘새누리당’으로 이어졌다, 15대 총선에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50석,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을 획득하며 3당 체제를 이어갔지만, 현재와 같은 여소야대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3당 체제의 한 축이었던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했으나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집권에 따른 여야의 정권교체는 일어나지 않았고 자유민주연합은 16·17대 총선에 참패하며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 되며 소멸했다. 

 
3당 체제는 국내 정치의 변화를 알린 시작으로 민주 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노태우와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의 합당은 국내 정치에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개발독재 시기 ‘부마항쟁(1979년 10월)’과 ‘6월 항쟁(1987년 6월)’ 등 부산의 야권 민주 세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주축으로 군부 독재 세력에 저항하며 민주화의 선봉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13대 국내 총선 이후 이루어진 3당 합당은 부산의 민주 세력을 군부 독재 세력과 결합해 지역의 정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또한, 3당 합당은 ‘3당 야합’이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회의감을 불러일으켜 14대 총선까지 유지되던 70%대의 투표율을 감소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정치학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합당 결정이 개인에는 성공적일 수 있으나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부적절한 선택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3당 체제가 지속한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로 변경됨에 따라 지역주의를 심화시켰고 이는 현재까지 국내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호남지역의 평화민주당과 김대중이 이러한 지역감정의 해소를 위해 영남 출신의 이수인 박사를 공천한 일은 후에 지역구 공천과 관련한 정치자금 문제를 발생시킨 배경이 됐다. 

 
1988년도의 3당 체제는 새롭게 탄생한 20대 총선의 3당 체제에서 발생할 문제점들을 예측할 수 있는 이정표라는 점에서 정치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국내사회는 13대 총선 이후 28년이 지난 현재 국내 사회는 새로운 여소야대와 3당 체제의 20대 국회를 맞이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이 1표 차이로 치열히 경쟁 중인 만큼 앞으로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의 행보가 20대 국회 이후 국내 정치사에 큰 영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이 현재 정치계의 지배적 의견이다.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는 6월 20대 국회에서 각 정당이 상호간의 다툼이 아닌 국민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에 집중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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