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에 맞서 정면으로 돌파한 정치인
지역주의에 맞서 정면으로 돌파한 정치인
  • 박경보 기자
  • 승인 2016.05.0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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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경보 기자]

 


 

지역주의에 맞서 정면으로 돌파한 정치인  

야당 불모지 대구에서 차기 대권의 싹 틔울지 관심

 



지난 4월 13일 열린 제 20대 총선은 ‘쇼크’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이변을 연출하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새누리당은 이번 총선에서 텃밭인 대구지역 의석의 3분의 1을 야당과 무소속 후보에게 내줬다. 특히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당선인이 경기도지사를 지낸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무려 25% 포인트 가까운 차이로 물리치고 당선되면서 뿌리 깊은 지역주의 청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여당의 전통 텃밭에서 당당히 승리의 깃발을 꽂다 


김부겸 국회의원 당선인은 이번 총선을 통해 여당 텃밭으로 불리던 대구 수성갑에 야당의 깃발을 꽂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이로써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심장인 대구가 냉정한 국민들의 심판에 의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될 전망이다. 김부겸 당선인은 정통 야당 후보로서는 31년 만에 대구에서 당선됐다.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기만 할 것 같았던 대구의 민심이 이변을 일으키며 ‘정치혁명’으로까지 표현되고 있다. 대구 수성갑 선거구에 출마한 김부겸 후보는 62.3%의 지지율을 얻으며 김문수 새누리당 후보를 큰 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했다. 또 더불어민주당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홍의락 당선인도 양명모 새누리당 후보를 여유있게 이기고 당선에 성공했다. 총선 개표 결과 대구의 12개 선거구 가운데 새누리당이 8석을 차지하고 더불어민주당 1석, 무소속은 3석을 차지했다. 지난 19대 총선 때 대구에서 싹쓸이 한 것과 비교하면 새누리당의 완패라고 볼 수 있다. 

 
김부겸 당선인은 자신의 선거 사무소에서 당선이 확정된 직후 “총선의 고배와 시장선거에서의 낙선을 겪었지만 도망가지 않고 또다시 도전하는 저의 진정성을 알아준 수성구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 대구는 ‘새누리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분위기다. 

 
한국은 특유의 지역주의 정치구도가 벌써 수십 년째 계속되며 정치계를 곪게 만드는 주범으로 지적되어 왔다. 국내 지역주의의 큰 축은 지금의 여권을 떠받들어 지지하는 대구와 경북을 더불어 범야권을 확고하게 지원하는 호남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김부겸에 앞서 지역주의를 뛰어넘는 도전은 수차례 있어왔다. 부산에서 야당으로 도전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부산의 정치적 야당성향을 일정부분 이끌어내면서, 이를 바탕으로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8년 전인 2008년 대구 수성구을에 도전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역주의의 한계에 무릎을 꿇었다. 대구 심인고 출신인 그는 알려진 대로 ‘노무현의 왕자’다. ‘노무현의 부산도전 정신’을 다분히 의식하며, 야권 무소속으로 대구 상륙을 감행했다. 상대는 재선을 노리던 주호영 의원이었다. 당시 ‘김부겸과 김문수’ 수준은 아니었지만,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유 전 장관은 떨어지더라도 대구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낙선 뒤 결국 수도권으로 돌아갔다. 김부겸 전 의원이 이번에 상당한 격차를 벌리며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따돌린 것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김부겸의 대구 도전에는 개인의 정치적 명운을 가르겠다는 명분과 함께 또 다른 취지가 담겨있는데, 바로 야당도시 대구의 부활이다. 비록 옛 일이지만 한 때 대구는 야당도시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었다. 1985년 실시된 12대 총선 당시 대구 지역구 당선자 6명 중 집권 여당 민정당은 2명에 불과했고, 야당은 4명이었다. 현재와 같이 각 지역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를 통한 범야권 인물의 당선은 1971년 8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무려 45년 전이다. 당시 경북 제1~5지역선거구인 대구(중·동·남·서·북구)는 모두 제1야당인 신민당이 차지했다.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대구가 ‘야당 도시’로 불린 배경이다. 대구를 관통하던 야권 성향의 정치적 기류는 1987년 대선을 기점으로 급격히 꺾인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구는 급작스럽게 확대된 지역주의로 인해 최근 한 세대 동안 이른바 보수 성향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선거를 싹쓸이했다. 여당 텃밭이자 정권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 김부겸의 당선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다. 게다가 김 후보의 승리는 단순히 지역주의를 허물었다는 상징성을 넘어 앞으로 대권 구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세 번의 도전 끝에 비로소 대구의 민심을 얻다


재야 운동권 출신인 김부겸 당선인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뒤 1977년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또다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92년에도 ‘이선실 사건’에 연루돼 불고지죄로 구속되는 등 군사정권에서 모두 3번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지난 1988년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한 김부겸 당선인은, 1991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기택 공동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에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헸다. 그는 1995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주축이 된 국민통합추진회의의 막내로도 역할을 했다. 1997년 국민통합추진회의가 해체될 때 한나라당에 합류해 2000년 경기도 군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당내에선 소장개혁파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운동권 출신으로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김 후보에게 정치란 늘 ‘비주류’ 또는 ‘경계인’의 길이었다. 한나라당 내 소장파 그룹인 ‘미래연대’를 이끌며 보수정당 쇄신을 주장했던 그는 2003년 대북송금사건 특검법안에 여당으로선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며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결국 김부겸 당선인은 같은 해 7월 한나라당을 탈당해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에 함께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으로 숨가쁘게 간판을 바꿔 달며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는 사이, ‘타협의 정치’를 외쳐온 그에겐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2009년, 2010년 원내대표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한 것은 그가 온전히 당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현실을 보여준다. 비록 2012년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됐지만 그가 한나라당 딱지를 완전히 뗀 것은 대구행을 선택하고 나서부터였다. 

 
지난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뽑혀 대구·경북 출신으로는 40년 만에 첫 선출직 야권 지도부가 된 김부겸 당선인은, 지역주의 타파와 경쟁의 정치를 기치로 내세우며 19대 총선에 대구행을 선택하게 된다. 16~18대 국회 때 경기도 군포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부겸 당선인이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4선의 안전한 길 대신 대구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신선하지만 무모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그는 “군포에서 4선을 하면 그건 월급쟁이”라며 친박근혜계 핵심인 이한구 의원(대구 수성갑)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김부겸 당선인의 대구 도전은 좌절과 석패의 연속이었다. 대구에서 자라고 대구초·대구중·경북고·서울대를 졸업해 ‘정통 TK’로서의 자격을 갖춘 그였지만 대구는 ‘기호 2번’을 호소하는 야당 정치인에게 섣불리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39.9% 라는 득표율은 그에게 재도전의 희망을 심어준 응원의 숫자이기도 했다. 직전 선거인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없었을 만큼 새누리당 강세 지역인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비록 실패였지만 소기의 성과를 얻은 김부겸 당선인은 총선 2년 뒤인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에 도전해 40.3%라는 높은 득표율을 보였지만 역시 새누리당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경기도 군포에서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한 관록의 정치인이었던 김부겸도 지역주의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 고배를 들어야 했다. 다시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2번씩이나 시민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대구 민심의 문을 두드렸던 김부겸 당선인은 이번 20대 총선을 준비하며 진심을 알리고 비전을 제시하며 대구지역에서 운신의 폭을 조금씩 넓혔다. 두 차례의 낙선 후 그는 이른바 ‘벽치기 유세’를 하며 지역 민심을 바닥부터 다졌다. 요란한 선거운동 대신 집에 있는 유권자들에게 조용히 지지를 호소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는 매일 수십곳의 골목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의 끈기있는 노력 끝에 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로 손꼽혀 온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상대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시종일관 우세를 점할 만큼 어느새 탄탄한 지지층이 형성됐다. 김부겸 당선은 이처럼 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를 꺾었다는 점에서 그가 단숨에 야권 대권 주자 반열에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지역주의 극복에 몸을 던지며 새누리당 아성인 험지 중 험지에서 4선 의원이 됐다는 점에서도 야권 대권 주자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야당 인사 중 누가 여당의 아성에서 이처럼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겠느냐며 “김부겸 당선인은 지역주의를 극복한 야당의 대표 지도자로 발돋움할 것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뜨는 별’ 김부겸, 차기 대권주자로서 행보 시작할까


김부겸 당선인은 평소 “상생과 공존의 정치는 나의 일관된 정치철학”이라고 밝혀왔다. 그가 원내에 진입하면 중도 성향의 의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쳐 당내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또한 당권·대권 주자 예비후보 군에 ‘김부겸’이란 이름 하나를 더 올리게 됐다. 김부겸 당선인은 당선 소감문에서 “여야 협력을 통해 대구를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우라고 대구 시민이 명령하셨다”며 “국민만 바라보겠다. 여야가 협력할 때는 협력하고 싸울 때라도 분명한 대안을 내놓고 싸우는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대구의 심장부를 장악한 김부겸 당선인을 두고 선거 전부터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일찌감치 ‘김부겸 대선 등판론’이 제기되어 왔다. 대구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유력 대선후보 대열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전당대회와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의 재신임 국면에서도 ‘김부겸 역할론’이 급부상했지만, 그는 대구 선거에 집중하겠다며 고사했다. 지난해 말 시작된 분당 국면에서도 당을 지켰던 김 당선인은 이번 대구 당선으로 당내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전망이다. 그는 당선 후 “야당이 거듭나야 한다. 야권분열을 해결하고, 계파정치 행태가 일소돼야 한다. 대구가 새누리당을 혼냈듯 광주가 더불어민주당에 경고장을 던졌다”며 당에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부겸 당선인의 여당 의원 경력은 대권 가도에서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당내 분란이 극심했던 때 뚜렷한 역할을 하지 않아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고향인 대구에서 한국정치의 오랜 숙원인 지역주의를 넘어서며 자신의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된 김부겸 당선인이 야권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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