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 계파Ⅰ] 三金 시대
[대한민국 정치 계파Ⅰ] 三金 시대
  • 오혜지 기자
  • 승인 2016.01.31 1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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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오혜지 기자]


 

막 내린 삼김 시대를 회상하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그려낸 정치 스토리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대중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 wikimedia

 

 

1950년대부터 2000년대 국내 정치계는 삼김의 시대라고 불린다. 삼김이란 정치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가르키는 말로 그들은 서로 권력을 나누며 협력하기도 하고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이며 정치계를 집권해왔다. 



삼김 주역들의 정치 활동 엿보기


삼김 시대란 한국 정치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이 중심이 돼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며 권력을 나눠 가지고 집권했던 시기를 말한다. 유신독재 시절 야당의 대표 주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유신 정권 이후로 계속해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며, 서로 필요에 따라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이어갔다. 

 
김대중은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를 통해 정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가 정계에 데뷔한지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로인해 국회가 해산돼 김대중은 의원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김대중은 1963년, 목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선출되면서 정치계에 복귀했다. 그는 야당의 지도자급 인물로 활동하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주연합당(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함께 출마한 박정희가 634만 표, 김대중이 539만 표를 획득했고 김대중은 대선에서 패배했다. 당시 김대중과 신민당은 제7대 대통령 선거가 100만 표 이상이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그는 귀국을 포기한 후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반유신 활동을 했고 정력적으로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김대중은 19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고 그 명예회장이 됐다. 이후, 8월 13일에 일본 도쿄에서 한민통 결성을 앞두고 있던 김대중이 8월 8일에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기 위해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방문했다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됐다. 그리고 사건 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에 김대중이 구출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에 다수의 여론은 71년도에 진행됐던 대통령 선거 이후 김대중의 활동이 박정권의 비위를 거스르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박정희를 향해 질타를 던졌다. 


1980년에는 신(新군)부 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을 대상으로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고 혐의를 조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을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구명 서신을 보냈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등이 압력을 넣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두환은 1982년에 김대중에게 망명을 권유했고, 김대중은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소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김영삼은 1954년, 28세의 나이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김대중과 더불어 군부 독재 시대의 야당 지도자로 꼽혔다. 실제로 그는 민주당 원내총무와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또한, 그는 1979년 10월에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켰고, 그 일은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민주화 5개 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로 23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5.18 민주화 운동 4주년을 맞이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신한민주당은 1985년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섰고, 이를 바탕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이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재야인사 150여 명과 함께 고문 저지 보고대회 후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가담하기도 했다.


김종필은 삼김 시대의 주역 중 한 명으로 박정희 정권과 함께 등장한 유신의 주역이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중령으로 박정희를 따라 쿠데타에 참여했던 김종필은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지만,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김종필은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았고, 이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같은 해 6월, 김종필은 제11대 국무총리에 취임하며 정계로 복귀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수립된 제4공화국 독재체제가 10·26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1979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쿠데타로 다시 군부 독재가 시작됐다. 김종필은 박정희 사후 직후인 1979년 11월 26일에 공화당 임시 당수를 맡았으나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정치활동금지법에 의해 1980년 10월 27일에 공화당이 해산되며 임시 당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구 공화당계와 유신정우회계 인사들은 김종철, 이만섭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구 3공화국 유신 인사들에 대한 부정축재 혐의 처벌 등으로 충청도와 수도권 일부, 전국구 몇 석에만 의존하였고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막을 내리기 이전까지 명맥만 유지했다.

 

▲ 1973년 8월 8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고 정적이자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 KBS 영상실록

삼김 시대의 시작을 알리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야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둘러싸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일전을 벌였다. 당시 김종필도 박 대통령의 이념을 계승하고자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할 움직임을 보이며 이른바 3김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며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했고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로 구속, 김영삼은 연금에 들어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5공화국 군부 독재하에서 민주화 세력이 다시 뭉치자 일시 협력관계에 들어가 제1야당의 양대 주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두 사람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타협할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됐다. 실제로 1987년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과 김영삼은 각각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또한, 정계에서 한동안 떠나있던 김종필이 충청권을 결집시키며 등장했으며 여당에서는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 여당의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1988년 4월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여권이었던 정당이 패배했고 야권이 영남, 호남, 충청권을 장악하며 여소야대의 구도가 조성 됐다. 그러나 1990년 노태우·김종필·김영삼이 3당 합당에 참여하여 거대 여당인 민자당(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고, 1992년 여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한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편 김대중은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1993년 7월에 귀국해 1994년 12월에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1995년 6월 27일에 치른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을 장악하는 등 대승을 거두자 김대중의 정계복귀 요구는 더욱 구체화됐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민주당 탈당파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당시 김종필은 1995년 여당인 민자당을 탈당하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에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민련 김종필과의 연대를 모색했고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단일화(DJP 연합)는 김영삼의 IMF 금융위기를 일으킨 경제 정책에 대한 실정 및 김대중의 대선 라이벌이였던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 등과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그리고 이 복합적인 요인들은 김대중이 네 번째로 도전한 1997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삼김 시대, 막을 내리다


김영삼은 1998년 2월 24일, 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줬다. 한편 김종필은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 이후,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의 시간을 지낸 뒤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DJP 연합 정권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했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에서도 그 권한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과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했고, 2001년 결국 DJP 연합이 붕괴되면서 김종필은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김종필은 2000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자민련의 의석을  17석 밖에 얻지 못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 총재로 남게 됐다.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노무현이 당선되었으며,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권한이 발의되자 김종필 역시 탄핵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 실패를 경험했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하게 됐다. 김종필은 이 일을 끝으로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7월 13일, 김대중은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영삼 대통령도 2015년 11월 22일 혈액감염 치료 중 서거함으로써 현재는 삼김의 일원 중 한 명인 김종필만이 존재하고 있다. 


3인이 정치권을 권력을 나누던 삼김 시대는 민주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으며 민주화와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다수의 사람은 삼김을 향해 영남·호남·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세 김 씨의 지역패권주의와 부패정치, 보스 중심의 붕당정치를 남겼다는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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