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막말 논란 속 정책 대결은 실종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전례 없는 변수로 인해 비교적 차분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양상 속에 각종 잡음과 설왕설래가 이어지며 유세 현장은 점차 달아올랐고, 막말과 네거티브 논란도 쏟아지며 그 속에서 정책 대결은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선거제 개편과 공천 잡음으로 총선 열전 시작
21대 총선의 출발점은 선거제 개편이었다. 국회 다양성을 확보하고 소수정당에 원내 진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대치 속에 큰 진통을 겪어야 했다. 애초 선거제 개편안에 반대해왔던 미래통합당은 허점을 공략해 비례대표 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했다. 비례대표 의석은 미래한국당에서 얻고, 지역구 의석은 통합당에서 가져가겠다는 전략이었다.
민주당은 이를 ‘꼼수’라 비판하며 황교안 통합당 대표를 고발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입장을 번복하고 시민사회와 연합형태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탄생시켰다. 이로 인해 당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수혜자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정의당은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출범으로 전례 없는 위기에 놓여야만 했다.
다음 과정은 선거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천 작업이었다. 올해 초부터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한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은 이해찬 대표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비교적 큰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조국 사태’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해 온 금태섭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강서갑에 정봉주 전 의원과 ‘조국 백서’ 필진 출신의 김남국 변호사가 출사표를 던지며 논란이 있었다. 지도부의 교통정리 속에 정 전 의원은 부적격 판정을 받고 탈당해 열린민주당을 창당했고, 금 의원은 경선에 탈락했으며 김 변호사는 경기 안산단원을에 전략공천 됐다.
한편 미래통합당은 ‘보수 대통합’으로 한 발 늦게 공천 준비를 시작했지만 초기 당내 주류 친박계 의원들이 자진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대거 ‘컷오프’ 되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후 김형오 전 공천관리위원장의 사천 논란 속에 “전권을 위임하겠다”던 황교안 대표의 약속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인천 연수을의 민경욱 의원 공천 과정에서 결과가 계속 뒤집어지며 ‘호떡 공천’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유승민계인 민현주 전 의원이 최종 탈락하며 끝내 유승민 전 새로운보수당 대표와의 화합도 이뤄지지 못했다.
여기에 홍준표 전 대표의 컷오프 논란으로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기 시작하더니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긴 한선교 전 대표는 공천 명단에 통합당 영입 인재를 당선권 밖으로 밀어내며 이른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통합당 지도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한선교 체제를 뒤엎도 원유철 대표 등이 미래한국당으로 이동해 공천명단을 새롭게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황 대표 측근을 한국당 지도부로 대거 밀어 넣었다는 비판에도 직면해야 했다.
코로나19가 부른 비대면 선거운동
4월2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여야는 격전지마다 거물급 인사들을 총동원하며 화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대면 접촉이 제한되면서 대체로 지난 총선에 비해 선거 운동은 비교적 조용하게 치러졌다는 평가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하거나 명함을 전달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많이 줄어들었고, 대규모 확성기 유세를 지양하고 주요 교차로 곳곳에 선거차량을 동원해 음악을 틀어 춤을 추는 모습도 크게 사라졌다. 대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이 많았다. 후보별 정당 색에 맞춘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와 시민들의 시선을 유도하거나 유튜브나 SNS를 통한 홍보에 적극적이었다.
양당의 핵심 메시지는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19 국난 극복’을, 미래통합당은 ‘정권 심판’이었다. 서울 종로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은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아 종횡무진 전국을 누비며 후보들을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이 위원장은 14일 종로구 숭인동 동묘앞역 앞에서 가진 마지막 유세에서 “정치의 안정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부족함도 많지만 민주당에 안정의석이 필요하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번 선거 지휘를 김종인 위원장에 맡기고 지역구인 종로 유세에만 집중하며 사활을 걸었던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현 정권이) 행정부, 사법부에 이어 입법부마저 완전히 장악하면 독재나 다름없는 폭주는 더 심해질 것”이라며 정권 견제론을 강조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코로나19 사태 대응을 위한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과 관련한 ‘포퓰리즘’ 논란도 발생했다. 정부가 소득 하위 70% 가구에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하자 민주당은 긴급재난지원금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겠다고 공약했고, 통합당은 ‘국민 1인당 50만원’ 지급을 들고 나오며 맞섰다.
북한 등 외교안보 이슈는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코로나19 방역에 집중하느라 대외 이슈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총선을 하루 앞둔 14일 순항미사일을 발사하고 영공 방어 훈련을 하는 등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며 긴장감을 높였지만 판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과거와 달리 북풍 공작이 오히려 역풍을 맞는 등 유권자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공방 가열되며 중대 변수 부각
하지만 선거판을 흔드는 네거티브 공세와 고소·고발전만은 여전했다. 특히 야권의 막말 논란이 잦았다.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하기 전인 3월31일 통합당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오른소리’의 ‘희망으로 여는 뉴스쇼 미래’ 진행자 박창훈 씨는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임기가 끝나면 교도소에서 친환경 무상급식을 먹이면 된다”고 발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같은 날 정승연 인천 연수갑 후보가 자신을 지원하기 위해 찾아준 유승민 의원에게 “촌구석까지 와줘서 감사하다”고 건넸던 인사도 문제가 되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대위 대변인이던 정태옥 의원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에 가고 망하면 인천에 간다는 의미) 발언까지 다시 회자되며 인천 민심을 뒤흔들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된 후 파문은 더 커졌다. 서울 관악갑에 출마한 김대호 통합당 후보는 당 선대위 회의에 참석해 “30대와 40대는 논리가 없다. 거대한 무지와 착각”이라고 말해 특정 세대 비하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하루가 지난 뒤 후보자 초청 토론회에서 지역 장애인 체육시설 건립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사용하는 시설이 돼야 한다. 장애인들은 다양한데,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된다”고 답해 다시 물의를 빚었다. 통합당은 결국 김 후보의 제명을 결정했다.
경기 부천병에 출마한 차명진 통합당 후보는 토론회에서 지난 2018년 세월호 자원봉사자와 유가족이 텐트 안에서 문란한 행위를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막말 논란에 정점을 찍었다. 당 윤리위는 ‘탈당권유’ 조치를 취했지만 차 후보는 유세 연설과 페이스북을 통해 문제성 발언을 이어나가며 재차 논란을 일으켰다. 통합당은 차 후보 역시 제명하기로 했지만 차 후보측의 제명결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돼 선거 운동을 정상적으로 마쳤다.
통합당의 구설이 이어지며 총선 후반 판세가 민주당 쪽으로 기우는 양상을 보이더니 여당에서는 안산단원을의 김남국 후보가 과거 한 유료 팟캐스트에서 여성 비하 및 품평 등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에 동조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세종갑의 홍성국 민주당 후보도 과거 강의 도중 “아내도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다”는 등의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고, 서울 강남병 김한규 후보는 캠프 SNS 단체 대화방의 선거운동 지침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은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범진보 진영이 180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발언해 미래통합당으로부터는 “오만하다”고 비판받고, 여당에게서는 “지나친 낙관론으로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며 지적받기도 했다.
정치공작 논란도 벌어져 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통합당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여권 인사 연루설 등 흑색선전에 나설 것”이라며 경계수위를 높였고, 통합당은 실제 관련 제보를 폭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이를 접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논란들이 시끄럽게 불거지면서 ‘정책 대결 선거’는 이번에도 실종됐다. 민주당과 통합당이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 미래한국당과 진행한 정책공약 협약을 비롯해 정의당과 녹색당, 미래당이 펼친 공동캠페인 등 각 정당이 내놓은 공약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게 13일 간의 뜨거웠던 진검승부가 마무리되었고, 유권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