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호남의 청백리 선비
[이슈메이커] 호남의 청백리 선비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9.05.10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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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호남의 청백리 선비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을 지닌 조선 중기 재상

 

 

박순
박순

 

간신으로 유명한 유원형, 이량 두 권신을 추방한 박순에 대해 선조는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 말했다.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을 소유자라고 평가 받는 사암 박순은 14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청백리로 알려진 사암 박순에 대해 이슈메이커에서 재조명했다.

 

호남의 대표적 선비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 3부자의 ‘부자3소’에 비견해 조선의 박정, 박상, 박우 3형제를 ‘동국3박’이라고 했다. 요절한 천재시인 박정은 백부이고, 기묘사회로 피해를 입은 박상은 중부이고, 장원급제하여 대사헌을 역임한 박우는 박순의 부친이다. 박순의 집안은 11대조부터 관직에 나아가 대대로 호서에 살다가 이후 광주·나주 등으로 처향을 따라 이주하면서 호남 사람이 되었다. 박순 역시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6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광주에서 서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서경덕의 제자가 되어 수학했다. 1553년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 홍문관수찬, 교리, 의정부사인 등을 거쳤다. 1558년 이조 좌랑,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사가독서했다. 1560년 의정부 검상을 거쳐 사인이 되었으며, 재상어사가 되어 호서를 순시하던 중 사복시 부정이 되었다. 1561년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온 후 다시 한산군수가 되었다. 1563년 성균관사성, 세자시강원보덕에 특별 제수되었으며 이후 직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 참의, 좌부승지, 우승지, 대사간, 대사헌, 예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1568년 중국에서 명종의 시제를 위해 태감 장조, 행인 구희직이 오자 접반사가 되어 맞이하였으며, 이어 성헌, 왕새 두 조사가 나오자 원접사가 되었고,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반송사로 서로를 다녀왔다. 대제학을 거쳐 한성부 판윤에 특별 제수되었으며, 이황을 제학으로 천거하여 실록찬집청 각방당상에 차임케 했다. 1569년 기대승과 함께 인묘를 문소전에 올릴 것을 주청했으며, 곧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예조 판서가 되어 감시를 관장하였다. 1571년 의정부 우찬성에 특별 제수되었으며, 「주자어류」를 간행할 것을 주청했다. 1572년 우의정이 되어 등극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1573년 환조하여 왕수인의 학술이 부정함과 그 폐단을 논했다. 이후 좌의정이 되었고, 이이와 함께 ‘미출신인통대헌’을 주청했다. 1574년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575년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름에 서경덕의 증직과 시호를 청하여 우의정과 문간의 시호를 받게 하고, 개성에 숭양서원을 세워 정몽주를 제사하고 서경덕을 배향했다. 동서의 붕당 대립이 본격화되는 와중에서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허엽·김효원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6년 이이가 사직하려 하자 왕에게 그를 우대할 것을 간청하였고 이후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이·성혼 등을 극력 추천했다. 1579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공안의 개정, 주현의 병합, 감사의 구임 등 폐정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증직과 포상을 주청했다. 1585년 정여립·김수·이발 등이 심의겸·이이·성혼·박순 등을 공격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호에 은거했다가 1586년 이후로는 영평의 백운계에 집을 짓고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었다. 이후 1589년 영평에서 사망했다. 1643년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1649년 영평 옥병서원에 배향되었다.

 

사암의 성리학

박순의 성리학적 견지는 이이와의 논쟁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논쟁은 박순이 53세, 이이가 40세였던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논쟁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박순은 스승인 서경덕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논쟁은 화담학파와 율곡학파의 세계관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퇴계학파에 비교하면, 두 학파는 다 상대적으로 기(氣)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기를 중시하는 의도에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박순과 이이의 논쟁에서 잘 나타난다.

 

박순이 기에 본체와 현상의 양 측면을 모두 상정하고 특히 본체로서 태허(太虛)를 강조하는 데 비해, 이이는 철저히 기를 현상의 차원에 국한시키고 대신 태극(太極)을 세계의 유일한 본체로서 강조한다. 이는 이이 자신이 세운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의 논쟁은 태허를 참된 세계의 본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이 논쟁이 있었던 1575년은 동서의 당쟁이 본격화된 시기이며,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선조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정립한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논쟁은 이후 서인 또는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반이 서경덕에게서 이이로 옮겨가게 되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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