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치열한 항일투쟁의 대표 독립운동가
[이슈메이커] 치열한 항일투쟁의 대표 독립운동가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9.03.1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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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치열한 항일투쟁의 대표 독립운동가

뚜렷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평가를 받다

 

 

최근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의 국가유공자 서훈을 권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보수 성향의 정당과 단체들은 반대의 논평을 내며 반발하고 있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포함, 대표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지만, 광복 이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이를 이유로 한국 정부는 김원봉 사후 60년이 지나도 서훈을 검토하지 않았다. 2019년은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의열단 창설 100주년이 되는 해기도 하다. 이에 강력한 항일투쟁을 펼치고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약산 김원봉을 이슈메이커에서 조명했다.

 

폭렬투쟁(暴烈鬪爭)으로 조국을 되찾고자 뜻을 세우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 같은 약소민족을 위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일제와 싸워주리라 생각하지 않은 김원봉은 독립군 양성을 목표하고 길림으로 향한다. 길림을 거쳐 봉천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1919년 2월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 및 폭탄제조법 등을 수료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체계적인 지휘관을 양성해 조직화된 광복군을 만들고자 했는데 김원봉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판단하고 학교를 자퇴해 새로운 개념의 부대는 결성하고자 한다. 이후 김원봉은 밀양, 대구 일대에서 3.1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사람들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한다. 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거사를 준비한다.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일명 밀양 폭파 사건으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황상규, 이성우 같은 선배 의열단원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김원봉이 단장을 맡게 된다. 이후 그는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을 지휘하며 각각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거나 일본군 대장을 저격하는 등 성과를 보인다. 6년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테러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푸군관학교 훈련생으로 입소해 투쟁노선을 변경한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 안효구와 제휴해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했다. 1932년 11월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고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대일선전전에 주력하였다. 1938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고. 장개석의 주선으로 김구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 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광복 이후의 활동

광복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활동하던 김원봉은 신탁동치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며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1946년 2월 14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공동의장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구실 삼아 자기 민족의 지도자를 학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과 함께 남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협상에 참가했다. 이때 남북연석회의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했고, 연석회의 전체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연석회의 이후 김원봉은 북한 지역에 머물렀고 더 이상 남한 지역에 내려오지 않았다. 김원봉은 비서로 지내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월북이 어쩔 수 없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김일성이 본격적인 남침을 준비하자 많은 희생자를 염려한 김원봉은 전쟁에 반대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중에도 납북된 안재홍, 엄항섭, 조소앙, 조완구 등 중도 성향의 정치인들을 도와주던 김원봉은 1952년 5월에 그는 국가검열위원장직에서 해임되고 내각 노동상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 휴전 이후에도 이전에 언급했던 납북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과 함께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1956년 7월 19일에 박헌영이 총살형에 처하고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그해 8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부수상 등 연안파가 ‘반(反) 조선로동당·반혁명 분파’로 몰려 숙청되었다. 하지만 김원봉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역임됐고,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건재를 과시했다. 이후 김원봉도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면서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다. 남침을 반대했으며 납북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도와주며 이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주장해서 김일성의 눈 밖에 났었던 그는 1958년 11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김원봉이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것이다.

 

일제에 맞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이어간 김원봉. 의열단 창설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할 때가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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