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소통Ⅱ]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무대…모든 것에 열린 공간, 광장
[로그人-소통Ⅱ]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무대…모든 것에 열린 공간, 광장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8.27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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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광장문화는 아직도 진행형, 자발적인 시민 참여의 공간으로 거듭나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로그人-소통Ⅱ] 소통의 공간을 열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무대…모든 것에 열린 공간, 광장


우리의 광장문화는 아직도 진행형, 자발적인 시민 참여의 공간으로 거듭나





모든 광장은 시민들이 주인공인 생활의 무대이며,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도시생활의 현장이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 등은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의 장소로 세계인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특히 광장의 발상지인 유럽은 ‘광장의 역사가 곧 유럽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광장은 문화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자 소통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리스 문명은 아고라에서 시작되었고, 로마제국을 이룬 것은 포로로마노의 도시 광장이다. 유럽의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시장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진보의 경쟁과 융합이 이루어졌다. 만남과 소통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광장’을 조명한다.





광장은 통행, 회합, 교환, 상호인식, 권력의 과시, 반란의 장소이다. 광장에서 공개처형이 이루어졌고 문화와 종교의 다양한 사건들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광장은 사회적으로 화합하는 열린 공간으로 다양한 역할을 구현한다. 장터, 문화, 예술, 의식, 군중집회 그리고 그 모든 행사에 사람들이 함께한다. 광장은 빈 터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무대이다. 모든 광장은 각자의 역사와 개성이 있다. 광장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구체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은 만남과 소통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21세기 도시의 중심으로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다. 





광장, 그리스 이래 도시민의 핵심적 생활·정치 공간


  광장의 기원으로 꼽히는 것은 그리스의 아고라(Agora)와 로마의 포룸(Forum)이다. ‘모이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기원한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그리스 도시국가의 핵심공간이었다. 아고라 주변으로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사교와 토론 등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아고라와 함께 큰 도로를 뜻하던 플라테이아(plateia)도 광장의 기원으로 거론된다. place, platz, piazza, plaza 등 광장을 의미하는 유럽 각국의 용어의 기원이 바로 이 플라테이아였다. 따라서 아고라와 플라테이아의 결합이 곧 광장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로마의 포룸 또한 주변에 신전, 목욕탕, 시장 등이 위치한 토론과 집회의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은 근대 유럽의 광장은 중세시대 광장을 그 모태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광장은 기본적으로 도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다수 군중이 밀집생활을 하게 되는 도시에서 주민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공동공간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광장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었고 규모 또한 소규모 광장부터 국가적 규모의 기념비적 광장 등 매우 다양했다. 기능도 다양해서 공중의 여론이 교류·형성되는 공론장이자 시장이기도 했고, 다양한 문화행사 및 종교의례가 이뤄지는가 하면 지배 권력의 위력이 현시되는 곳이자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광장은 도시의 핵심부에 위치하면서 도시의 모든 것이 집중되는 공간이었다. 도시 중심부는 권력자들의 공간이었고 광장 주변은 길드 본부, 교회 그리고 시장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광장에 가까울수록 지배와 중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절대주의 시대 이후 기념비적 대규모 광장들이 조성되어 절대 권력의 공간으로 배치되었다. 지배의 공간은 곧 저항의 공간이 되기도 했는데, 루이 15세 광장이 혁명광장이 되어 단두대가 설치된 것은 대표적인 예였다. 근대이후 도시화와 대중사회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광장은 더욱 큰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일상과 여가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대중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조건 하에서 광장은 대중 정치의 유력한 공간이 되었다. 





우리 역사 속의 광장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에서 광장은 그렇게 친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시청 앞 서울 광장, 청계 광장, 광화문 광장 등이 들어서면서 어느덧 광장은 제법 익숙한 것이 되었다. 더욱이 21세기 들어 한국사회는 제법 많은 ‘광장 경험’을 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응원, 2008년 광우병 쇠고기 관련 촛불시위 등은 광장의 의미를 새롭게 각인시켰다고 보인다. 여기에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공간이 새롭게 등장하여 쇠고기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사이버 광장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처럼 친숙해진 ‘광장’이지만 한국 전근대 역사에서 광장 또는 그것에 비견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 기록들에서 광장이란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곧 광장이 근대 이후 외부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도시가 제법 발달했던 유럽과 달리 한양을 제외하면 도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던 전근대 한국에서는 광장 또한 존재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한제국기에는 광장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다고 보이지만, 광장의 역할을 하는 특정한 장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종로 일대였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가 종로 일대에서 개최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아관파천 이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부터 연말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종로와 경무청 앞, 인화문 앞 등이 주요 장소였다. 백정에서부터 정부 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공동의 사안을 놓고 집회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식민지기에 들어와서도 광장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성격을 갖는 옥외집회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광장 정치가 활성화되기는 힘들었다.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들은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의 상·중·하 광장이나 선은전 광장(鮮銀前廣場)으로 불렸던 현재의 한국은행 앞 광장 등이 있었다. 


  한편 식민지 시기 조선인 사회의 대표적 광장 역할을 한 것은 탑골공원이었다. 조선인 사회의 중심은 북촌과 종로였고 탑골공원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종의 명에 의하여 공원으로 바뀐 이래 탑골공원은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북촌의 대표적 도심 광장공간으로 기능했는데, 결정적으로 탑골공원이 조선인 사회의 중심공간으로 부각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장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탑골공원은 1932년까지 총독부가 직접 관리했다. 총독부는 탑골공원을 수차례 폐쇄하려고 시도했으며 의도적으로 요정 및 요리점의 신축을 허가해 결국 북문(공원 북부에는 조선인이 많았다)이 폐쇄되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총독부는 탑골공원의 광장적 성격을 없애기 위해 나무를 빽빽하게 심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광장 문화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971년 12만평 규모로 여의도에 만들어진 5.16광장은 100만 명을 동원해 행사를 치룰 수 있는 거대한 광장으로, 권력자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탄생한 광장이다. 이후 서양의 도시를 본 따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마다 광장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 문화는 관(官)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들이 광장에 모여 정치적 요구를 밝히면 정부에서는 이를 막는 것에 급급해 광장 사용을 원천 봉쇄하는 일이 불과 몇 년 전까지 있었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등장한 길거리 응원문화는 광장의 주도권이 권력자에서 대중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대중에 의한 광장문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광장,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서울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5.16 광장은 이후 여의도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며 김포공항이 지어지기 전까지 공항으로 쓰였다. 해마다 국군의 날이 되면 이곳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위한 대규모 종교행사가 거행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1997년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 태어나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여의도 공원’으로 바뀌었다. 2012년 12월 24일 독신남녀들의 짝을 찾기 위한 ‘솔로대첩’행사가 여의도 공원에서 개최되는 등 과거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여의도 광장이 완전히 시민의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여의도 광장이 애초부터 정치적 공간이었다면 서울 시청 앞 광장은 과거부터 시민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서울광장의 역사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월산대군 사저(덕수궁)로 돌아온 1897년부터 시작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종은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하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형 도로를 닦고 앞쪽에는 광장과 원구단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대한문 앞 광장은 고종보호 시위,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6월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주요무대가 되었다.


  또한 2009년 5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발인식, 같은 해 8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 2010년 천안함 순직용사 합동분양소,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합동분양소로 이용하는 등, 정치·사회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의 광장은 특정집단의 기획이 아닌, 동일한 목적을 가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우리만의 ‘광장 문화’는 앞으로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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