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II] 르네상스 예술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History Culture III] 르네상스 예술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 방성호 기자
  • 승인 2014.03.24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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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방성호 기자]

예술 작품으로 보는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두 천재가 낳은 비운의 걸작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두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많이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의뢰 받으면 그것을 보존할 재료를 만드느라고 정작 본 작품에 손대는 시간이 늦어질 정도로 기발한 것, 디테일한 곳에 관심이 많았다. 성모 마리아도 신의 위치에서 어머니의 모성애가 느껴지는 인간적인 위치로 변화시켰다. 그는 다양한 관심 때문에 정작 완성작이 많지 않다.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디테일에는 관심이 없고, 본질의 발현에 관심이 많았다. 돌덩어리 스스로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바, 그것을 발현시켜내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바티칸 성당의 천장에 있는 천지창조를 그릴 때도 속도가 늦다는 교황의 지적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 완성될 거냐는 물음에 그는 ‘내가 만족할 때’라고 대답한 사람이다. 

  둘은 정말 달랐다. 그래서 아류가 아니라 거장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다. 






비운의 걸작 1.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가 식탁에 함께한 제자들 중에 누군가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서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동요의 순간이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분노의 감정들이 제자들을 엄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의 완성이 거의 끝날 때까지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와 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신이면서 인간인 그리스도의 얼굴은 지상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상의 우아함을 담은 얼굴을 화면에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다의 얼굴, 스승을 팔아넘길 만큼 사악하고 잔인한 배반자의 얼굴을 상상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장시간의 사색과 수많은 습작의 습작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리스도와 유다의 얼굴을 찾았다.   


  “나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이른 아침 작업대에 올라가 작업하던 일을 목격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는 그곳에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하루 종일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사나흘은 붓이라고는 손에 잡지 않고 그저 서너 시간씩 관찰만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미술사에 남긴 최고의 걸작 ‘최후의 만찬’이 그려지던 과정을 직접 목격했던 도미니크회 수도사 마테오 반델로(Matteo Bandello)가 전하는 말이다.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의뢰로 1495년경에 시작된 이 작품은 2년이 지난 1497년경에 거의 마무리가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다시 수도사 반델로가 전하는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레오나르도는 코르테 벡키아의 기마상 작업을 하다가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작업을 멈추고 최후의 만찬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작업대에 올라가 몇 번의 붓질을 한 뒤에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레오나르도의 이러한 변덕을 예술가에게 내재한 천재성이 깨우는 ‘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반델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영감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그림을 그리다가 그 불씨가 꺼지면 그림에서 손을 땠다는 작업 방식을 통해 그가 수도원 식당 벽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전통적인 벽화 기법인 프레스코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작업하면서 프레스코가 아닌 기름과 유약에 색을 풀어 작업을 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면에 젖어있는 석회를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만 하기 때문에 하루에 작업할 수 있는 면적이 제한적이다. 그는 이러한 프레스코 기법의 제한성을 피하기 위해 기름과 유약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결국 이러한 재료의 사용 탓에 벽이 갈라지고 색이 바라는 등 작품이 급격히 손상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최후의 만찬이 완성 된지 몇 해가 지나지 않은 1500년, 밀라노에는 대홍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작품은 습기 때문에 급격히 부식되고 벽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인 미술사학자 프란체스코 스카넬리(Francesco Scanelli)가 1642년에 기록한 자료에는 작품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있다고 한다. 후대의 사람들은 손상된 이 작품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보수 작업을 감행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작품 손상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1888년대 독일의 대문호 볼프강 괴테가 남긴 글을 보면 당시 내린 폭우에 벽화가 2피트 정도 물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훗날 30여년에 걸쳐 유능한 보수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레오나르도의 걸작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독재자 무솔리니가 벽화 복원 사업의 총책임자를 유배시키는 바람에 복원 작업이 지연되고 말았다.

  1908년부터 루이지 가베나기(Luigi Cavenaghi)라는 뛰어난 전문가가 벽화 복원에 투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왼손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하지만 걸작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8년 8월 14일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가 폭격을 당하고 무너졌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쌓아둔 모래주머니 덕택으로 벽화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벽화를 살리겠다는 노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복원 전문가 마우로 메치올리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작업에 투입되면서 대가의 걸작은 그 본래의 색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이 작품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손상되었던 상태에서 첨단 장비와 기술을 동원한 오늘날에는 그 원형이 거의 복원되었다.






비운의 걸작 2. 메디치 가문의 영묘

오로지 미술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아간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그는 전 작품 생애를 통틀어 두 번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덤을 계획했다. 한 번은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심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했던 메디치(Medici)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번의 계획 모두 주변의 음모와 모함으로 인해 그 원대한 포부는 미약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1513년, 당시의 상황은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지오반니가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고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를 시기했던 화가 라파엘로가 미술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한 영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느라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상태였던 미켈란젤로는 1520년 다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 메디치 가문의 가족묘를 위해 지어졌던 산 로렌초 교회 보수공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일명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1449~1492)라 불리던 로렌초 1세의 조카이면서 훗날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된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미켈란젤로에게 산 로렌초 교회에 메디치 가문을 위한 묘를 만들도록 명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계획에서 제의실 또는 성무 안치실이라고 부르는 교회에 부속 건물에 모두 메디치 가문의 고인 6명을 위한 묘를 설치할 생각이었다.

  원래 이곳에 안치될 인물들은 1492년 서거한 위대한 로렌초, 파치가의 음모로 생을 마감한 그의 동생 줄리아노, 그의 막내 아들이자 느무르의 공작이었던 줄리아노, 그의 손자인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그의 아들이자 훗날 레오 10세 교황으로 추대된 지오바니,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로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된 줄리오였다. 하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 계획 때와 비슷하게 미켈란젤로의 계획은 축소되어 오늘날의 규모로 완성이 되었다. 당시 교황의 영묘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미켈란젤로의 계획은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비열한 방해로 좌절되고 그들의 책략에 따라 식스투스 4세가 건립한 시스티나 예배당을 위한 천장화 작업에 투입되었다. 한 번도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없던 미켈란젤로가 이 쉽지 않은 작업에서 보기 좋게 망신을 당하고 도망치리라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예상과는 달리 미술사에 또 다른 걸작이 탄생했다. 바로 천지창조로 알려진 ‘아담의 탄생’, ‘최후의 심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미켈란젤로가 처음 계획했던 무덤에는 모든 예술의 형식을 종합해 죽음과 영혼의 부활을 상징하도록 되어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세 단계로 구성이 되었던 본래 계획의 가장 아랫단에는 강의 신을 의인화하고 있는 조각상이 바닥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도록 되어 있었고, 그 위로 두 번째 단에는 고인이 안치된 석관과 그 좌우로 하루의 네 가지 시간인 새벽, 아침, 낮, 그리고 저녁을 의인화하는 상이 배치되었다. 가장 상단부인 세 번째 단에는 모두 세 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고인의 좌상, 그리고 그 좌우로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의인상이 설치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단부의 벽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약의 모세와 연관된 청동뱀을 묘사하는 벽화가 들어가게끔 계획이 되어있었다.

  줄리아노의 무덤에 좌상으로 표현된 고인은 전사의 갑옷을 입고 의지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다. 건장한 그의 모습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행동하는 삶, 즉 ‘Vita Activa’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의 좌우 벽감은 비어있지만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슬픔에 잠긴 대지와 미소를 머금은 하늘의 의인상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지를 상징하는 의인상 아래에는 밤을 상징하는 잠자는 여인, 그리고 하늘의 의인상 아래에는 건장한 몸집의 낮의 의인상이 배치되었어야 한다. 

  턱을 손에 궤고 사색에 빠져있는 모습의 로렌초를 표현한 좌상은 사색하는 삶, 즉 ‘Vita Contemplativa’에 대한 상징이다. 로렌초의 경우 좌우 벽감에는 어떠한 도상적 의미를 가진 조각상들이 들어갔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아래로 해가 저무는 황혼과 해가 뜨기 전인 새벽을 의인화하는 남녀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무덤에 좌상으로 나타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는 모두 모두 로마 장군의 갑옷을 입고 있다.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의 로렌초, 그리고 당당한 기세를 풍기는 줄리아노, 미켈란젤로는 이 두 인물의 석상 아래에 하루의 네 가지 시간을 탄생시킨 천상을 두지는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간에 대한 종속은 죽음과 끝, 그리고 파괴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벽과 낮, 저녁과 밤이라는 시간적 관념을 의인화하는 이 인물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의인화한 이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새벽은 생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찬 채 깨어나는 듯하다. 낮은 이유 없이 분노해 몸을 뒤척이고 있고, 저녁은 피곤에 지친 모습이다. 밤은 두 눈을 완전히 감지도 못하고 평안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은 시간이라는 숙명적인 굴레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지친 인간의 존재를 의인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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