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 300여 년에 걸쳐 유럽을 지배한 대(大) 명문가, 메디치
[History Culture I] 300여 년에 걸쳐 유럽을 지배한 대(大) 명문가, 메디치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3.24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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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르네상스의 견인차, 메디치가(家)



300여 년에 걸쳐 유럽을 지배한 대(大) 명문가

 

예술가에 대한 적극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진정한 패트런(patron)


 


르네상스의 중심지에 선 인물들은 개성이 넘치는 천재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도덕률로 상징되는 중세의 갑갑한 전통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인문주의로 나아가며, 인간성의 해방을 추구하였다. 이들 천재들의 활동은 메디치가나 푸거가 같은 부호와 교황청에 의해 지탱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메디치가의 100여 년에 걸친 예술가에 대한 후원 활동은, 메디치가의 지원 아래 탄생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라파엘로, 도나텔로 같은 천재들의 명성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 인구 30여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만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이자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바로 메디치 가문일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출신도 보잘것없는 가문이었지만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더 나아가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했다. 메디치가의 활동은 상업과 정치라는 현실적인 분야뿐 아니라 종교적 분야, 그리고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통해 급기야 르네상스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존재로 인해 피렌체 또한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수백 년 후의 오늘날 시민들까지 조상들의 후광에 힘입어 관광객들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얻고 있다.

  이미 얘기했듯이 메디치 가문은 썩 훌륭한 집안 출신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믿는 사람은 그들 가문 출신 외에 없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점차 사회의 윗 단계로 상승할 수 있었다.



 

금융업과 무역업으로 부와 명예 거머쥐어

원래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던 메디치가가 성장하게 된 계기는 바로 금융이었다.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9)가 1395년 삼촌에게서 로마은행을 인수해 문을 연 메디치 은행. 이 메디치 은행이야말로 근대적 은행의 효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메디치가는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메디치은행의 성장배경에는 교황청과의 인연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에 의해 3명의 교황이 강제폐위 되거나 체포되자 메디치가문은 폐위위기에 처한 요하네스 23세에게 거액의 보석금을 융자해주며 피렌체로 데려와 거처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게 된다. 이후 메디치은행은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된다. 이 때문에 교황은 물론이고 유럽의 왕가와 명문 귀족들은 메디치가문이 보여준 신의에 감동해 예금과 비자금을 맡기게 됨으로써 메디치가문은 막대한 부를 쌓아갔으며 정계에도 진출한다. 메디치가문은 '한 번 인연을 맺은 고객은 절대 배반하지 않으며, 죽더라도 신의를 다한다'는 신념으로 역대 바티칸 교황들의 거래은행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당시는 몇몇 예술작품에서 고리대금업자를 해골로 표현할 정도로 고리대금업자를 멸시하고 은행업을 죄악으로 여기던 세태에서 벗어나 금융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던 때였다. 또한 도시경제의 성장과 함께 시민계급이 성장했고, 시민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이와 맞물려 조반니 에 메디치는 정치적으로 귀족들에게 유리한 세금제도를 철폐하고 평민들의 입장을 옹호하며 상당한 돈을 공화국에 기부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조반니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 코시모는 교황청 자금의 유통을 맡아 운영하며 메디치은행 지점을 피사, 밀라노, 제네바, 리옹, 아비뇽, 브뤼주,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 설립해 메디치가문의 세력을 떨친다. 또한 코시모는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된 직물제품을 유럽은 물론 중동지역에 수출하고 그곳의 향신료, 설탕, 견과류 등을 수입해 큰 이윤을 남긴다. 



 



메디치 가문의 절정, 로렌초 데 메디치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권력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었다. 최초에 정권을 쥔 코시모 데 메디치는 민주 정치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으나,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때에는 전제 군주와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약 300년간에 걸쳐 피렌체와 고향인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렸고, 그동안 교황 넷을 배출했으며 프랑스 왕비 둘을 포함해 수많은 유럽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문예부흥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이를 통해 시대를 지배했으니 참으로 드문 지배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가문의 뛰어난 인물들은 다른 지배자들처럼 으스대며 예술가를 후원한 게 아니라 참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예술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독특했으니 역사에 빛나는 한 장을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로렌초의 시대는 메디치가가 그 번영의 정상을 맞이한 때이자 동시에 가장 평화로운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의 밑에는 미술가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는 1440년에 학자들을 모아 플라톤 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피렌체는 이탈리아 학술의 중심이 되었고, 고대 아테네와 어깨를 겨룰 정도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재밌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는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양아들이었다는 점이다. 로렌초는 나폴리 군대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진 피렌체를 구하고 무명의 10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를 발탁하여 양자로 삼았다.


 

안나 마리아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피렌체에서 명문가로 성장한 메디치 가문은 크게 키아리시모 2세 가문, 대코시모 가문, 토스카나 대공 가문의 세 집안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초기 메디치 가문을 이끌던 키아리시모 가문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우리가 아는 메디치 가문의 명성에 걸맞은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출세 초기여서 그런지 어쭙잖은 정치적 행동(키아리시모 2세의 손자 살베스트로는 정치적 야망을 위해 서민들을 사주하여 권력을 쟁취했다. 그러나 귀족 계층의 반격으로 실각한 후 망명했다)으로 인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그 뒤로 가문의 영광을 이은 것이 대코시모 가문이다.

  이 가문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이끈 로렌초 데 메디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고 불리기까지 한 그는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문이 배출한 인물 가운데는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프랑스 왕비에 오른 카트린 등이 있었다. 







  한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조카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알레산드로란 인물을 피렌체의 세습공작에 임명했는데 그가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알레산드로는 예술을 사랑하고 폭력을 증오하던 메디치 가문 출신과는 달리 매우 잔인하고 독재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친척이자 동료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대코시모 가문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끝나지 않았으니 대코시모의 아우인 로렌초의 후손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로렌초의 먼 후손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토스카나 대공에 올랐으므로 이 가문을 토스카나 대공 가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가문은 프랑스 왕비에 오른 마리 드 메디시스를 배출했으며 18세기 전반까지 토스카나의 권력과 더불어 메디치 가문의 명성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시작되는 이탈리아 전쟁(1494~1559)에서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다. 이에 르네상스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메디치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코시모 3세의 딸이자 선제후 요한 빌헬름의 미망인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가 1743년 세상을 떠난 뒤 메디치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나 마리아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렌체에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그 결과 오늘날 피렌체는 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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