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TextbookII] 역사교과서 논쟁의 뿌리
[History TextbookII] 역사교과서 논쟁의 뿌리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3.11.25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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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식민주의사관과 민족주의사관의 대립


교과서 논쟁의 숨겨진 진실


한국사 교과서는 그동안 진보·보수 이념의 대리전이 펼쳐지는 장이었다. 교과서 논쟁의 핵심은 한국 현대사의 주체와 목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있었다. ‘좌편향’ 교과서는 민족을 주체로, 통일을 목표로 설정하는 반면, ‘우편향’ 교과서는 산업화·민주화를 이뤄낸 국민을 주체로, 선진화를 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실제 교과서 논쟁의 뿌리는 지난 100여 년에 걸친 사관전쟁에서부터 시작된다. 에도시대부터 연구되어온 일본의 식민주의사관과 이서 맞선 조선의 민족주의사관의 오랜 대립이 지금의 역사교과서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식민주의사관의 배경

에도시대에 『고사기』, 『일본사기』 및 그 밖의 일본 고전을 연구하는 일본 국학자들은 오랜 기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했다. 이들에게서 형성된 조선관은 막부말기 정한론 및 메이지 유신 이후의 조선 침략의 유력한 관념적 지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일선동조론에 영향을 주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학자 시데하라, 호시노 등이 주장한 것으로 문화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동일한 조상이라고 말하며 분가되었던 조선이 다시 본가인 일본에 합류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이념이다.

일선동조론과 함께 식민주의사관의 핵심이 타율성 이론이다. 타율성 이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야시, 오다 등은 한국사가 태고부터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남쪽은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북쪽은 기자, 위만, 한사군 등의 중국세력이 지배했고 남쪽은 신공 왕후의 정벌을 전후해 수 세기 동안 일본의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는 소위 일본의 남선경영설, 내지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론이다.

미시나가 주장한 반도적 성격론은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으로 규정해 한국사의 최대 형성요인이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임을 말했다. 이는 한국사의 변증법적 역사발전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그가 말한 바로는 반도적 성격이 대외투쟁관계, 외교관계, 국내 정치권 형성, 당벌성, 문화면에서 사대주의를 형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후쿠다, 구로다 등은 일본과 한국사를 비교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단계는 일본의 봉건제가 성립되었던 가마쿠라시대보다 뒤처져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본의 식민사관을 밑바탕으로 일제강점시기 한국역사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고, 이는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으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 많은 역사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민족주의사관의 활동

20세기에 들어서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식민주의 역사관을 유포하던 시기에 한국의 민족주의 학자들에 의해서 민족주의 역사관이 강하게 대두했다. 그들은 외세 침략이라는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이 자기 전통과 역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위기 극복의 지혜와 신념, 용기의 원천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주의사관은 크게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 사학으로 나뉘어 식민주의사관에 대항했다.

민족주의사학은 역사연구를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식해 민족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강조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며 민족정신을 ‘조선 혼’으로 강조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확립했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했다. 특히 인류의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연속으로 판단하며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정신을 강조했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해 ‘조선 얼’을 강조했고, 문일평은 ‘조선 심’을 역설했다.

사회경제 사학은 백남운으로 대표된다. 백남운은 삼국시대 이전을 원시공동체 사회, 삼국시대를 고대노예제 사회, 통일신라 시대에서부터 조선왕조 후기를 중세봉건사회로 보면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했다. 특히 정체성이론이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의 역사적 단계를 고대 사회적 단계로 규정한 것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왕조 후기를 아시아적 봉건사회로 설정함으로써 식민주의사관의 중세 부재론에 대항했다.

이처럼 민족주의 역사학은 강렬한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국사를 통하여 국권 회복을 기하려 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주체성과 정신사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또 식민주의 사학이 가장 심하게 훼손시킨 한국 고대사 부문에 역점을 두고, 한국 고대사의 웅혼한 모습을 복원해 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의 중심 이병도

일본의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역사연구의 주류로써 일본학자와 한국학자에 의해 다양하게 연구되었고, 이는 이후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만들었다고 비판받는 대표적 인물이 이병도 교수이다. 소위 ‘이병도사관’ 또는 ‘두계학파’라고 불리는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병도가 학계 원로로 자리를 굳혀가던 1970년대 중반에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국사학계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사관적 잔재에 대한 내부 척결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일제하의 활동을 은폐하거나 해방 이후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워 일제하의 활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이병도는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 박사의 『일한고사단』을 접하고 국사연구를 시작한다. 요시다 박사는 일본 사학계에서 알려진 석학이자 경술국치 이전부터 식민사학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런 요시다 박사에게 수업받은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로 활동했다. 당시 일제하에 한국사 연구를 한 대부분 일본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이념에 투철한 황국사관의 학자였고, 이들이 추천을 받은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로 활동한 것이다. 이후 식민사관 총서인 『조선사』 간행에도 참여를 한다. 『조선사』는 37권으로 구성된 연구서로 앞서 언급한 식민사관이 철저히 반영되었다. 이병도는 이후 고대사 연구에 착수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바 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병도가 고대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스승인 이케우치 박사가 만주 지리 역사 연구 보고를 꾸준히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일본 학자들의 의도와 방향에 성실하게 따랐으며 그들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일본의 ‘만선사관’ 창출과 관련하여 일제 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있었다.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게는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민족사의 구축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일제 침략 하에서 침윤되었던 식민사학의 폐단(정체성론, 타율성사관, 지리적 결정론,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을 일소하고 전통문화와 민족 발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인식시켜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해 민족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하지만 해방 후 국사학계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한 학계가 주축이 되었다. 해방 이후 그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1955∼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으로 재직했고, 『한국사』 발간편집위원으로 한국사 총괄서를 저술함으로써 역사학계 최정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1950년 국방부정보국 전사편찬위원장, 1954년 서울대 대학원장, 1955년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장, 1956년 진단학회 이사장·회장 등을 겸직하는 등 학계의 중추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사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서울시 문화상,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받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학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이유로 이병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사관을 창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조선사》 편찬을 거쳐 해방 이후 친미 세력인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권력자들의 국사학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 이병도의 국사 연구 행로는 그야말로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역사적 이론 근거를 마련하는 연구로 계승됐다. 그뿐만 아니라 후배양성으로 제2, 제3의 식민사관 학자를 배출함으로써 국사학계는 여전히 일제가 심어 놓은 잔재에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다.



확고한 역사의식의 필요성

일본에 의해 주입된 식민주의사관의 잔재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도 많은 혼란을 주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한국사에서 깨끗이 도려내지 못했다. 현재 지속하고 있는 교과서 논쟁 역시 겉보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비치지만, 그 내면에는 식민주의사관과 민족주의사관의 사관전쟁이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인 강만길 교수는 그의 저서 『역사와 청년』에서 한 나라의 청년은 그가 속한 사회의 과거를 바로 알고,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견지하는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그 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기 전에는 현재의 시대상황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로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교과서 문제는 강 교수가 언급했던 것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에 대한 문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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