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러 정상회담
러시아인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1854년 4월 2일, 러시아제국의 팔라디호는 남해의 섬 거문도에 입항해 11일간을 머물며 ‘조선동해안도’를 제작했다. 이후 급격히 발전한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 사건에서도 증명된다. 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념 갈등과 함께 끊어졌던 관계가 1990년 ‘한·소 수교’를 통해 다시 이어지기까지는 무려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난 11월 13일,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방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4개국 국가지도자 중 새 정부 출범 이후로는 첫 방문이라 세간의 시선이 집중됐다.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이후 두 번째인 두 국가수반의 만남은 향후 한·러 간의 관계에 큰 변화를 예감케 했다.
한국·러시아 관계 개선과 공동 번영 위한 정책 조율
지난 13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우리나라의 ‘유라시아 협력 강화 정책’과 러시아의 ‘아태지역 중시 정책’이 큰 맥락에서 상통하며 이를 접목, 양국 간 협력의 잠재력을 구현함으로써 유라시아 지역 내 협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데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 특히 새로운 한·러 관계와 미래를 위한 ‘유라시아 시대’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관계 발전 방향과 분야별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한·러 정상은 이번 공동성명을 통해 양국 간 정치·안보 대화를 강화하고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며 교역 및 투자를 확대해가는 실질적인 방안들을 언급했다. 특히 우리 기업의 나진-하산 물류협력 사업 참여와 같은 우선적으로 가능한 협력사업과 조선·북극항로 개발 등 새로운 협력사업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기로 했다. 극동시베리아 지역 개발을 위한 양국 간 금융 분야 협력과 농업·수산업·산업 투자 등도 호혜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또한 정상회담에서는 남·북·러 3각 사업의 시범사업으로 포스코, 현대상선, 코레일 등 우리 기업이 ‘나진-하산 물류협력사업’의 철도·항만에 참여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이 사업은 러시아 극동 하산과 북한 나진강을 잇는 54km 구간의 철로 개·보수와 나진항 현대화 작업, 복합 물류 사업 등이 핵심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나진-하산 물류협력사업’에 우리 기업이 참여하는 것은 얼어붙은 남북 관계를 상징하는 ‘5·24 조치(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시행된 북한 선박의 우리 측 수역 항해를 금지하는 조치)’의 점진적 해제를 시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양 정상은 한·러 간 공동 투·융자 플랫폼을 구축, 투자리스크를 완화해 우리 기업의 러시아 진출을 지원하고, 중장기적 추진사업으로 ‘북극항로 이용에 대한 러시아 측 협조 당부 및 극동지역 항만개발 MOU 체결’,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협력을 위한 MOU 체결’에 각각 합의했다.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대북정책 합의
‘나진-하산 물류협력사업’의 경우에서 보듯 한·러 협력에는 지리적으로 사이에 위치한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새로운 한·러 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협력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 마련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안정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그간 러시아가 북한의 핵 보유를 용납하지 않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앞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러시아가 건설적 역할을 해주기를 당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줄곧 주창해온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는 남북한 간 신뢰 구축이 필수적이다. 이번 회담에서 언급된 우리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의 내용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공감을 표하고, 이후 러시아가 남북관계 개선과 역내 안보 및 안정의 중요한 조건인 ‘한반도 신뢰구축 노력’을 적극 지지하겠노라고 답했다. 아울러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해서도 환영하며 양국 간 협력을 활성화해 나가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러시아, 동북아 안정을 위한 균형자 역할
한·러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 여야는 각각 ‘고무적이다’라는 평가와 ‘절반의 환영’이라는 자세를 보였다. 새누리당 유기준 최고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확보하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진전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반면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정상회담에서 양국 현안에 대한 진전된 합의를 이뤄낸 점”에 대해서는 환영의 뜻을 표했지만, “직접투자가 아닌 간접투자라는 점에서는 절반의 환영”이라며 원활한 사업 진행을 위해 정부의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를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러 관계는 물론, 남북관계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한국과 러시아의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러시아 테스크포스(TF)팀이 국내에 들어와 한·러 정상회담 ‘의제(agenda)’에 대해 논의하고 돌아갔으며, 이에 따라 향후 한반도 및 극동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매우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정치’ 분야에서 한반도 주변 4강 중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회복, 강화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특히 ‘한반도 및 동북아 안정과 평화’ 부분을 주목해 러시아가 북핵 억제력을 포함해 북한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으로 관측했다. 아울러 동북아 안정을 위해 4강 관계에서 러시아가 ‘균형자’ 역할도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이라 전망했다.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는 미래 구상, 제2의 실크로드
특히 이번 방한 일정 중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였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대한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논의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핵심 과제로 꼽힌 것은 ‘실크로드 익스프레스’이다. 부산에서 북한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연결되는 철도망인 실크로드 익스프레스는 최근 북극해 온난화로 인해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와도 연계된다.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자원에 기댄 ‘유라시아 에너지 네트워크’ 구축도 중요한 부분이다. 가스관, 송유관 등이 북한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단기간 내에 성과를 바라보긴 어렵지만, 실현됐을 때의 경제적 가치는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다.
현재 세계 경제권은 다자간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며 블록화 되고 있다. 아시아를 비롯한 환태평양 국가를 포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는 미국이 주도하며 일본, 호주, 캐나다, 멕시코, 싱가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협정에서 배제된 중국은 미국에 맞불을 놓는 RCEP를 주도하고 있다.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을 포함하겠다는 다자간 FTA이다. 이외 대서양 경제권을 중심으로 하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는 미국과 유럽공동체(EU)간 추진되고 있는 FTA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또한 이 같은 경제협력체제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묶겠다는 것이며,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주도할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한 시도는 타 공동체와의 이익 상충, 견제에 부딪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면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이들은 이번 한·러 회담이 세계 각지에서 결성되고 있는 경제협력관계의 한 축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수차례 동북아 평화 협력구상을 제안해왔다. 전문가들은 취임 첫 해부터 이례적으로 활발히 진행되는 외교활동에 대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실현을 위한 첫 단계가 아니겠는가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박 대통령은 ‘한·러 대화 포럼’ 폐막식 연설에서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 최대의 단일 대륙”이라며 “오랜 역사의 질곡을 지나며 고립되고 단절된 유라시아에 새로운 제2의 실크로드를 열어 유라시아를 ‘소통과 개방, 창조와 융합’의 공간으로 다시 되살려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러 관계 회복과 긴밀한 협조 체제가 ‘유라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세계 각국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