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Man Ⅱ] - 시들지 않는 연기 내공
그들은 언제나 현명했다, 지혜로운 노인들
- 역사 속 배우들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명연기자들
그들의 행보가 무섭다.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재조명 받은 네 명의 ‘할배’들은 방송뿐만 아니라 CF, 캐릭터사업에까지 진출했다. 한 모바일 게임 업체에서는 최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에 이들의 캐릭터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왕이며, 아버지이고, 회장님인 그들은 어느새 동네에서 볼 법한 친근한 할아버지의 느낌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을 얕봐선 곤란하다. 수십 년의 연기 경력을 가지고 한국 방송 역사와 함께해 온 위대한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늦깎이 코믹 이미지 변신으로 인기 몰이 한 이순재, 신구
서울대 철학과 54학번인 이순재는 젊은 시절부터 지적인 이미지로 명성을 날렸다. 1964년 동양방송(TBC) 전속 탤런트가 된 그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56) 이후 57년간 영화·연극·드라마를 합쳐 1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1900년대 이후 ‘사랑이 뭐길래’와 ‘허준’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연기 변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지붕뚫고 하이킥’에서는 인상적인 코믹연기로 ‘야동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기 뿐 아니라, 직업상으로도 끊임없는 변신을 보여줬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한 그는 1998년부터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연극 연출가로서 25년만 관객과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신구는 1962년, 16세의 나이에 동랑 유치진의 연극 ‘소’에 출연하며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신구’라는 예명도 유치진에게 받은 것이다. 이후 1960년대에 동아연극상 남우주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1970~1980년대에는 최고 권위의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기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다.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날린 신구는 영화 ‘홍의장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개국’, ‘왕과 비’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많이 알려진 ‘사랑과 전쟁’에서는 인자한 이미지의 검사로 변신했다.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코믹한 이미지를 많이 보여주기도 했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패스트푸드 광고에서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유행어까지 탄생시키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로맨티스트 회장님 박근형과 푸근한 아버지 같은 백일섭
백일섭은 1965년 KBS 공채 5기로 데뷔해 MBC 개국작 ‘태양의 연인’부터 ‘길’, ‘유심초’, ‘아들과 딸’, ‘제3공화국’ 등 드라마와 ‘사녀’,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 등 다양한 영화에도 출연했다. 당시 ‘제11회 백상예술대상’(75) 남자최우수연기상과 ‘제29회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방송국 인기엽서 1위였다는 그는 육영수 여사의 초대를 받아 청와대에 방문한 최초의 연예인이기도 하다.
연기, 연극, 영화 분야에서 다양한 필로그라피를 쌓아온 이들은 최근까지도 각 장르에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2010년 개봉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는 폐지를 주우러다니는 윤소정(송이뿐 역)을 흠모하게 되는 우유배달부 김만석을 연기하며 관객을 울렸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150만을 돌파한 이 영화로 이순재는 2011 중국 3대 영화제중 하나인 금계백화영화제에서 외국어영화부분 만장일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 때 큰 준비 없이 연기에 뛰어드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화제성과 팬 층을 끌고 가기 위한 무리한 마케팅 전략이 결국은 작품의 질도 떨어뜨리고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시청자도 떠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순재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영화 ‘드림걸즈’를 예로 들며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하던 비욘세를 감독이 떨어뜨렸어요. 살 때문이었죠. 하지만 비욘세는 6개월 간의 노력 끝에 결국은 배역을 따 냈습니다. 이런 준비가 있어야만 연기에 도전할 수 있는 겁니다”라며 당시의 기획자들과 어린 연기자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삶 자체가 곧 한편의 작품이 되는 날까지 그들은 아마도 멈춰서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