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레미제라블 앓이’에 빠졌나
대한민국은 왜 ‘레미제라블 앓이’에 빠졌나
  • 안수정 기자
  • 승인 2013.04.08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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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공감한 자유, 박애, 평등이라는 보편적 메시지
[이슈메이커=안수정 기자]

[Social Focus]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비참한 사람들)의 배경이 된 프랑스 시민혁명. 부패한 왕정에 반발하는 학생들은 힘없고 약한 민중 편에 서 있던 라마르크 장군의 사망을 계기로 혁명을 일으킨다. 민중이 자신들의 삶과 자유를 개선하기 위한 이 혁명 대열에 동참해 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만도 버거운 민중에게 ‘희생’과 ‘모험’이 뒤따라야 하는 혁명은 사치였다. 결국 소총 몇 자루와 제한된 탄약에 의존해 바리케이드 뒤에 진을 친 소규모 혁명군은 정규군의 엄청난 화력과 조직력 앞에 무너지게 된다. 바리케이드 뒤에는 시민군의 피투성이 시체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길바닥을 뒤덮은 핏물이 강물처럼 흐른다.

 

576만 관객 동원한 레미제라블 흥행혁명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의 박해를 받던 그는 하룻밤 잠자리를 마련해 준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은식기와 촛대를 훔쳐 달아난다. 하지만 장발장의 잘못을 덮어준 신부의 손길 아래 구원을 받고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시장까지 되면서 새 삶을 살게 된다. 이후 장발장은 불행한 사람들, 특히 남성 이기심의 희생이 된 불쌍한 여자 판틴에게 관심을 갖는다. 모두들 그를 존경하지만 오직 한 사람, 광신적인 경찰관인 자베르 형사만이 의심을 품고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던 중 장발장은 정부가 8년 전부터 찾고 있었던 전과자가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잡혔다는 소문을 듣는다. 무서운 갈등이 그의 마음속에 벌어지고, 결국 장발장은 무고한 사나이를 구하기 위해 자수하고 또다시 징역살이에 보내진다. 하지만 죽어가는 판틴이 부탁한 그녀의 어린 딸 코제트를 위해 탈옥을 감행하고 파리로 온다.

한편 혁명을 준비하던 파리의 혼란한 거리에서 마리우스의 눈에 천사 같은 코제트의 모습이 포착되며 사랑의 불꽃이 인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 중 하나였던 마리우스는 편지를 남긴 채 ‘혁명’과 ‘동지’를 선택하게 되고, 파리가 바리케이드로 뒤덮여 있었던 어느 날 장발장은 두 젊은이의 사랑을 알아낸다. 그는 마리우스가 비밀결사 동지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바리케이드로 부상당한 그를 하수도(Léviathan, 성서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의 창자 속)로 구조한다. 이후 마리우스는 쾌유하고, 코제트와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장 발장은 코제트와 마리우스에게 자기의 진짜 신원을 밝히고 둘의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어서 혁명을 위해 피 흘린 모든 이들이 만나 바리케이트 위에서 깃발을 흔들고 함께 자유를 기뻐하며 세 시간에 거친 영화의 막이 내린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17년간 집필한 소설 레미제라블을 1862년 출간하면서 서문에 “이 지상에서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 같은 성격의 책들이 무용지물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위고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지난해 말부터 영화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다시 등장한 레미제라블은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을 ‘레미제라블 앓이’에 빠뜨린 장본인 영화 레미제라블(감독 톰 후퍼)은 지난 2월 2일까지 누적관객 수 576만 명(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동원하며 한국 역대 외화 박스오피스 TOP 10에 진입했다.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앨범도 3만장 가까이 팔려 나가면서 수익 상으로는 현재까지 420억 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오늘 4월 서울에 입성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벌써부터 올해 최고 흥행작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17년 동안 집필, 세기 걸작으로 손꼽혀

▲ 1862년 발표된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이자 자기희생과 속죄를 통해 성인으로 거듭나는 한 인간의 생애에 무게 둔 세기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인기는 원작 소설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생생한 영화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행적이나 원작이 담고 있는 사상을 알고자 하는 관객들이 소설 독자로 유입돼 영화 개봉 이후 원작 소설 판매량은 20만부에 이른다. 그러나 원작 소설은 분량이나 깊이에서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민음사와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각각 5권으로 번역, 출간된 레미제라블은 총 2,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또한 나폴레옹 1세의 실각을 부른 워털루 전투로부터 장발장이 바리케이드에서 마리우스를 구해 탈출하는 파리 지하도까지 과도할 정도로 세밀한 묘사 때문에 읽는 이들의 인내심이 요구된다.

1862년 발표된 레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이자 역사·사회·철학·종교 등 인간사의 모든 것을 축적한 세기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연구자 해럴드 블룸은 “20세기에 위고와 견줄 만한 작가는 없으며, 21세기에 빅토르 위고만한 작가가 나올지 의심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1802년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난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초기작은 낭만주의, 자유주의에 경도됐으며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의 집권을 기념하는 시 ‘1830년 7월 이후’를 발표하고 1845년 상원의원에 선출되는 등 왕당파에 속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철두철미한 공화주의자로 변신해 루이 나폴레옹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후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집권과 함께 20여 년간 망명과 추방을 거듭한 빅토르 위고는 아내와 자식을 차례로 잃게 된다. 레미제라블은 이런 고난 속에서도 식지 않은 그의 창작열로 완성된 대작이다. 빅토르 위고가 1845년부터 17년간 집필한 이 작품은 발표 이후 1884년까지 20여 년간 500만부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레미제라블 원작은 자기희생과 속죄를 통해 성인으로 거듭나는 한 인간, 장발장의 생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에서 “이 죄수는 예수로 변모하고 있다”, “하느님이 이 사건에서 장발장 속에 보였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영화나 뮤지컬이 원작에 충실한 만큼 줄거리와 진행순서는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 1832년 6월 봉기에 대한 묘사 역시 원작에서는 코제트에 대한 부성애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포슐르방이란 이름으로 파리에 숨어 살면서 아버지로서의 행복을 느끼던 장발장은 어른으로 자란 코제트가 귀족 출신으로 혁명에 가담한 청년 마리우스와 사랑에 빠지자 바리케이드를 찾아가 총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구출한다.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 장면은 혁명의 기운이나 격정을 강조할 뿐 구체적인 반대 대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왕당파에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위고의 혁명에 대한 지지가 분명하게 깔려 있다. 한편 스크린에서는 스펙터클한 감동을 위해 민중 봉기 장면이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제 18대 대통령 선거결과에 따른 상실감 회복

극장을 찾은 많은 관객들은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되는 사회의 모순을 변혁하려는 청년 마리우스의 열정과 행동에 열광했고, 이 갑작스런 문화적 신드롬은 많은 해석들을 끌어냈다. 특히 대통령 선거와 맞물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레미제라블 내용을 한국의 정치현실 등에 대입해 이해하려는 관객들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그중 가장 지배적인 해석은 제 18대 대선 정국 직후 패배감과 허망함과 상실감에 젖어 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영화가 위안을 주었다는 설명이다. 즉 대한민국의 유권자 중 상당수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절반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절반에 가까운 국민들은 원치 않은 후보를 대통령으로 맞게 된 셈이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가 담긴 레미제라블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대개 후자에 해당된다. 레미제라블 배급사 측도 이러한 부분이 영화 흥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트위터리안 @jaja****는 “선거 패배 후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200년 전 프랑스가 꼭 지금의 우리나라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또 다른 트위터리안 @gir****도 “영화를 보고 울컥했다. 특히 젊은이들의 시민혁명 장면이 선거 결과와 겹친 모양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트위터리안 @cinem****도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피에 의해 세워진 근대적 민주주의를 여러 예술 장르를 통해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는 광주조차 지우려고 애쓰고 폭동이라 부르며 모욕하고 있다”며 격함 감정을 드러냈다.

 

사회 양극화에 따른 ‘힐링’ 수요 충족

한편 레미제라블이 주는 힐링의 의미를 사회적 맥락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영화와 원작은 19세기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권력의 횡포,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이들의 희생, 장발장이 보여주는 헌신과 사랑, 용서를 극적으로 펼쳐내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박애,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예술적 감동으로 표현한 것이 레미제라블 신드롬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설명한다. 즉 팍팍한 삶과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좌절과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의 드라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 겸 고려대 연구교수는 “프랑스혁명 후 나아지지 않은 세상,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더 비참해진 가난한 자들의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관통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난을 견디지 못한 판틴이 머리카락도 팔고 몸도 팔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 즉 가난 때문에 나락에 빠지는 모습이 한겨울 혹독한 경제적 궁핍과 맞물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도 레미제라블이 사회성에 개인성을 결합한 영화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점이 관객들의 감성을 강하게 건드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 2월 영화를 관람한 정다혜(26·취업준비생)씨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지만, 나만 이렇게 아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혔다. 레미제라블 영화를 두 번째 관람한다고 밝힌 이도진(35·자영업)씨는 “가난 때문에 나락에 빠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현재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지만 내일을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았다”며 “덕분에 영화관을 또 찾게 됐다(웃음)”고 덧붙였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을 통해 인생과 사회의 복잡성 속에서 오직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한 사람의 고통과 절규, 불굴의 의지와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다른 야심도 욕심도 없는 시민 장발장에게 법과 사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계속 부과하고, 운명과 역경 앞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은 우리네 현실을 거울처럼 조망한다. 지금 그저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행동이 해고와 징계, 파업 투쟁으로 이어진 수많은 현대판 장발장들이 영화와는 달리 극적인 반전과 성공을 이루지 못한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레미제라블 앓이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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