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 장병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 장병준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8.03.02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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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 장병준
 

애국애족의 정신을 후손에 전하다

 

 

 

 

한국의 사회 지도층이 잇달아 여러 추문과 범죄와 연관되며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 국민은 가진 것만큼 사회에 모범을 보이거나 희생하는 사회 지도층을 현실에서 찾기 어렵다. 그로 인해 과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역사 인물이 조명되고 있다. 장병준은 호남 부호 출신으로 일가족이 독립 운동에 투신했고, 광복 후 반독재 투쟁을 벌인 인물이다. 그의 인생 파노라마를 따라가 보았다.

 

호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1025개의 아름다운 섬들로 이뤄진 신안군. 그중 이름도 생소한 장산도에서 한 애국자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장병준(張柄俊). 호남은 조선 중기 호남 선비 정여립이 난에 연루되며 지역이 반역의 향으로 낙인찍힌 후, 명문가를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선비의 씨가 마른 호남에서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산도의 간척 사업을 이끌 만큼 개척의 의지가 강했다. 
 

장병준의 부친인 장진섭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식들을 외지로 유학 보냈다. 장병준은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원을 거쳐 니혼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배움을 마치고 귀국한 장병준은 지식을 개인의 출세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실천하는 데 활용했다. 그는 목포와 신안에서 3·1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조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만세 운동은 조선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숨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3·1운동에 참여한 많은 지식인들은 독립을 외교적, 물리적으로 확보하는 데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장병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물려준 한성정부에 참여했고, 임시정부가 구성된 이후에는 지금의 의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됐다.
 

3·1운동 이후 국내 활동은 어려워졌다. 수많은 한국인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전 세계에 인상을 각인시켰기 때문에 일경의 감시망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병준은 굴하지 않고 1920년 3월 1일을 대한독립 1주년 기념일로 정하고 ‘대한독립 1주년 축하경고문’ 등 유인물을 제작하며 투쟁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당시 그의 신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다. 일경은 장병준을 고문해 그의 정체를 밝히고 연관자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장병준은 자신이 박현숙이라는 인물이라며 일경의 수사를 교란하고, 모진 고문에도 조직원들의 신상을 발설하지 않았다. 
 

석방된 장병준은 다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전라도 지역 인사들을 규합했고, 1920년대 후반 시대적 분위기였던 유일당 운동에 가담해 신간회 목포지회를 결성했다. 좌파와 우파 인사들과 두루 잘 지냈던 그는 신간회 간부로서 최적의 적임자였다. 국내를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장병준은 일본이 국군주의화된 1930년대부터 뚜렷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반독재 투쟁에 헌신하다
 

해방 직후 장병준의 행보는 1946년 반탁운동 가담을 제외하면 두드러지지 않는다. 좌우통합운동에 앞장섰던 그에게 독립 후 좌우익의 극한 대립은 불편한 현실이었다. 정치일선에 물러나 있던 장병준은 1950년대 말 정치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는 이승만 정부가 독재노선을 노골화하며 민주정치가 마비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60세를 넘긴 노인이었다. 장병준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앞장섰고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이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선거에서 선택받지 못한 장병준은 다시 정치에서 물러나 조용한 삶을 살다 1972년 사망했고,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병준의 일가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명문가로 인정받는다. 독립운동에 매진한 장병준과 그의 형제가 1세대, 한국 전쟁에 참가하고 정치·관료·의학계에서 활동한 조카들이 2세대, 한국인 최초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인 장하준 교수 등이 3세대를 이루고 있다.
 

국민들은 아직도 한국 사회는 정경유착이 깊고 사회 지도층이 책임과 모범을 다하기는커녕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우려한다. 밝은 미래를 희망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사례를 먼 과거에서 찾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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