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의 압박, ‘솜방망이 처벌은 없다’
경제민주화의 압박, ‘솜방망이 처벌은 없다’
  • 안수정 기자
  • 승인 2012.08.29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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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배임죄 재벌 총수 집행유예 금지 추진
[이슈메이커=안수정 기자]

[Economic Crime] 재벌총수

 

1988년 10월 16일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교도소 탈주범 4명이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들과 대치하던 중 사살되거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인질극을 벌인 탈주범 중 한 명은 “대한민국은 ‘돈’ 없고 ‘빽’ 없으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고 외쳤다. 24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발의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때문이다.


법원, 한화 김승연 회장에 징역 4년 및 법정구속

지난 8월 15일 서울 강남 소재 1천 100억 원대 빌딩을 상속·증여세 없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특경가법상 횡령)로 기소된 중소기업인 이모(64)씨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더불어 이 씨의 횡령·탈세를 거든 혐의로 함께 기소된 공인회계사 오모(38)씨, 허모(40)씨에게는 각각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 최동렬 부장판사는 “이 씨의 범행은 잘못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사로부터 무려 259억 원을 횡령한 점 등을 감안하면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며 이같이 판결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재판부는 “회계사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며 공정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이행해야 하지만, 이를 망각하고 경제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덧붙였다.이들의 수법은 치밀했다. 부동산 임대업 등을 하던 H사 대표 이 씨는 회사가 소유한 상업용 빌딩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면 40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회계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회계사들에겐 증여를 도와주면 1억 5천만 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회계사들은 빌딩을 담보로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빌려 홍콩으로 빼돌린 다음 외국인 투자자를 가장해 H사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방법을 제안했다. 결국 이씨는 2008년 10월 빌딩을 담보로 300억 원을 대출해 홍콩에 있는 서류상 회사(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중국 철강회사에 투자하는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이후 그 투자가 실패한 것처럼 꾸미고 투자금 대부분을 들여 H사 지분 60%를 사들인 뒤 자녀들에게 양도했다. 투자 실패를 가장한 탓에 회사 주식가치가 떨어지자 그 틈을 타 나머지 지분도 국내에서 추가 증여했다. 하지만 회사 청산 작업을 밟는 과정에서 세관이 은행에 대출자료를 요청하는 바람에 자녀들에게 실제로 주식을 증여하지 못했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회사원 박모(48)씨는 “한쪽에서는 몇 만원이 없어 가족이 동반자살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한편에서는 어떻게 하면 세금을 적게 낼지 머리를 맞댄다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대전에서 요식업에 종사하는 최모(52)씨는 “직원들은 죽어라고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는데 경영자라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책임감이나 윤리의식이 있었는지 강한 의심이 든다”며 “잘못된 방법으로 사회를 흐리는 이들에게는 엄중한 법의 잣대를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위장 계열사의 빚을 그룹 계열사가 대신 갚게 해 회사에 수천억 원의 손실을 떠넘긴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배임) 등으로 불구속기소된 김승연(60) 한화그룹 회장에게 법원이 징역 4년, 벌금 51억 원을 선고하며 법정구속 판결을 내렸다. 서울 서부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서경환)는 8월 16일 오전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그룹회장으로서 절대적 영향력을 이용해 부실 회사를 부당 지원토록 하고 배임을 통해 그룹에 2,883억 원의 피해를 입혔으며, 가족의 이익을 위해 계열사에 피해를 주고 차명계좌를 편법 운용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이어서 재판부는 김 회장에 대해 “그룹 본부 전체가 김 회장을 정점으로 상명하복의 지휘체계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홍동옥이) 차명 재산을 보고 없이 처분하고 부채 처리를 단독으로 감행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며 “법 앞에 금권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범죄에 대한 법원의 정의 실현 의지를 명확히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의 법정구속 소식에 트위터 아이디 mad***은 “재벌은 잘못해도 집행 유예가 당연 했었고 설령 벌을 받더라도 대통령 사면 이 수순이었는데 법정 구속은 나름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밝혔다. 아이디 pneu***도 “법원의 김승연 한화 회장 실형 선고 법정구속을 환영한다”면서 “무전유죄 유전무죄 국법체계 반발심리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 법 앞에서 특권층은 없다. 그 누구도 법을 어기면 처벌 받아야 한다”고 법원 판결에 환영의 뜻을 전했다.

 

횡령 등 범죄 저지른 기업인 집행유예 금지는 당연

현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경가법) 제 3조는 특정재산법죄의 이득액이 5억 원 이상일 때 가중처벌하는 규정을 두면서 이득액이 5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일 때 3년 이상의 징역형,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일 때 형의 하한으로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규정하고 있어 재벌총수 등의 대형 경제범죄에서 이득액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경우라 하더라도 판사 재량으로 정상을 참작해 법원이 형기의 2분의 1까지 작량감경 할 수 있어 대다수 집행유예가 선고됐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이로 인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국민들의 법에 대한 감정은 한층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법행위를 한 재벌총수 등 기업경영인에 대한 처벌과 양형이 다른 범죄자들에 비해 매우 불공평하다며 불법경영자에 대한 책임 추궁 및 사후구제 강화를 위한 사법제도 개선을 최근 촉구했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 2007년 발표한 법원의 화이트칼러 범죄 양형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특경가법상 횡령, 배임죄로 가쇠된 149명의 피고인을 대상으로 할 때 1심과 2심의 종합적 집행유예 선고 비율이 83.9%인 125명에 달했다. 결국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인 대형 경제범죄에서 법원의 재량권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인정되어 법원이 사실상 작량감경 등을 자의적으로 행사해 집행유예가 남용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재벌범죄의 재발을 방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새누리당 전·현직 의원들로 구성된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횡령·배임을 저지른 기업인에 대한 사법부의 집행유예 판결을 원천 금지시키는 내용의 경제민주화 1호 법안(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횡령·배임 규모가 30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이나 15년 이상의 징역을, 50억 원 이상 300억 원 미만이면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5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이면 7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 개정안을 적용하면 법원이 재판 과정에서 형기를 감경한다고 하더라도 집행유예 조치를 할 수 있는 3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결국 배임·횡령을 저지른 대기업 총수들은 실형을 받게 되는 형태이다.

이 개정안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개정안이 법의 공정성과 집행의 형평성을 국민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기업 총수들이 횡령이나 배임을 저질렀을 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라는 의미로 국민의 법 감정에 충실했다고 주장한다. 즉,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1999년 이후 10대 재벌 총수 중 7명이 2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실형은 단 한명도 받지 않고 모두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를 때 반드시 입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이번 개정안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재벌 총수 등 오너들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등 각종 핑계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경실련 관계자는 “그동안 재벌 총수들은 수백에서 수천 억 원을 횡령하고도 집행유예 등의 선고를 받거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며 “어느 누가 보더라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번에 발의한 법안이 반드시 현실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기업오너 겨냥한 특정 법률 ‘법의 평등원칙’위배

한편 경제인과 학계 일부에서는 정치권의 기업인 집행유예 금지를 담은 특가법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재벌 총수들은 대놓고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특가법은 기업 총수 등 재벌 오너를 겨냥한 것으로 대선을 이기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유럽발 위기가 세계 경제를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 이 시기에 재계 오너들의 손발을 꽁꽁 묶는 법안이 나오는 것 자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재계에서는 기업인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기업 오너 등 특정계층을 겨냥한 법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행태가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고 꼬집었다. 대기업 총수나 기업 오너가 배임·횡령 등의 잘못이 있다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재계 총수 모두의 문제로 내몰면 안 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대기업 오너 경영 체재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특가법이 통과된다면 오너의 활동반경이 줄어들고, 이는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 위기 상황 대처 미흡 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7월 제주 서귀포시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7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인이 횡령 등의 죄를 짓는다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업인에 대해서’라는 전제아래 집행유예를 금지한다는 것은 법의 평등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미명아래 재벌 총수를 겨냥한 특가법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도 배임이나 횡령을 저지른 기업인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고 해서 모두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유전무죄라는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강조하며, 새누리당의 특가법 개정안은 입법부의 처분적 조치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교수는 “집행유예 남발을 견제하는 것과 (집행유예)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치다”라면서 “법이 특정계층을 겨냥해 이를 정형화 한다는 것은 처분적 법률로 법의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경영 활동 결과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배임의 경우 명확한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며 “만약 대기업의 오너가 이사진의 반대에도 신규 사업을 진행했다가 손실을 봤다면 이를 배임이 될 수 있는 사안으로 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라고 덧붙였다.

 

기업자율 통제·시민참여 강화 최선

결국 전문가들은 사회 기득권층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벌이는 화이트칼라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 ‘사후약방문식’의 양형기준의 강화보다는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적 규제, 투명하고 건전한 사회문화 풍토 조성 등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기업범죄 예방을 위해 금융감독원은 사외이사 공시제도와 지배주주의 사외이사 선임 요건을 제한하는 등의 사외이사제도 손질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정윤모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원은 “배임·횡령으로 인한 기업의 도산은 정상적인 경영에서 일어나는 기업의 흥망성쇠와는 성격이 다르다. 기업지배구조나 내부통제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으면 사전에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외이사제도 도입 등 제도를 강화한다고 해도 작심하고 저지르는 화이트칼라 범죄는 사실상 속수무책과 다름없다. 따라서 기업이 자율적으로 사회적 책임 경영을 다하도록 유도하는 게 최선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화이트칼라 범죄 속성상 사법 당국에서 범죄 유무를 일일이 적발하고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는 데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도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적극 대응하는 사회문화적 접근법을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업 자율에 맡긴 사회적 책임 경영도 기업의 내부 통제기능이 약화될 경우 범죄예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일으키는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식이 바로 서면 비윤리적 활동을 한 기업이 자연 도태되고 정도 경영을 하는 기업이 적자생존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윤용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 대표는 “선진국은 정부가 시민단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함으로써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시되고 있다”면서 “기업의 올바른 경영을 감시하기 위해 시민단체의 생산적인 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국민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기업 총수 스스로 개혁 프로그램을 내놔야 할 때가 왔다. 법 규제에 쫓겨 다니기보다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배역(配役)을 떠맡아야 ‘무전유죄, 유전무죄 대한민국’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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