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꽃, 최한기
실학의 꽃, 최한기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7.11.3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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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실학의 꽃, 최한기


한국사에 경험주의 철학을 남긴 이단아

 

 

세종 시기 이후 조선의 과학이 발전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과학사의 과정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는 경험론적 인식론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물에 대한 과학적 관심의 부족 탓이다. 그런 조선에서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돈다는 주장을 하며 세간의 비웃음을 산 실학자가 있다. 과학적인 사고, 실험적인 연구를 중시한 경험주의 철학자 최한기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역사상 가장 근대적인 실학자

최한기는 여느 조선 학자들과 달랐다. 관직이나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학문 연마에 경주했다. 그가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양가(養家)가 가졌던 재산 덕분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인 최한기는 5촌 당숙인 최광현의 양자로 입양됐다. 남녀 노비가 모두 20명이 넘었을 정도다. 최한기는 이를 기반으로 개성과 서울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연구할 수 있었다.

 

이 지구의는 최한기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기념관

 

 

최한기의 가세는 1860년 이후 급속히 기울었다고 한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해서다. 특히 그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신간 서적을 구입하는 데 많은 재산을 바쳤다.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았던 최한기는 구입한 서적을 연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을 구상하고,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활동은 양친 최광현의 영향이 크다. 최광현은 일찍이 중국에서 오래된 고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최한기는 수집된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고, 덕분에 수입한 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나가는 사고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청나라의 해양전략지 ‘해국도지’, ‘영환지략’을 바탕으로 ‘지구전요’를 편찬했다. 세계인문지리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구전요는 당시 기준으로 세계 정세가 돌아가는 상식을 망라한 책이었다. 최한기는 지구전요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중 <명남루집>이라는 이름으로 현존하는 100여 권의 저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비견되기도 한다. 최한기는 최근 주목받은 역사인물이기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저서를 다수 집필했음에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형편이다.


 

▲중화의 세계관이 아닌, 객관적인 세계의 모습이 반영돼 있다. ⓒ실학박물관

 

 

유기론, 미증유의 철학을 남기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적은 모두 최한기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그만큼 그는 조선에서 접할 수 없던 지식이 담긴 외래 서적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외국 지식에 대해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에는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함선이 조선 바다에 빈번하게 출입했다. 1866년 프랑스, 1871년 미국과 국지전을 치르면서 조선 내에서 '외국 오랑캐'에 대한 적극적인 항전의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점점 개항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늘고 고종도 개항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이러한 변화의 기초를 닦은 인물 중 한 명이 최한기다. 그가 남긴 저서와 수입한 서적이 이른바 개화파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사실 조선시대 철학의 정수는 성리학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와 형이하학적인 기의 관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만물의 원리를 밝히는 학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청과의 전쟁과 예송논쟁을 거치며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는 보수성이 강해져 사회변혁의 아이디어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특히 기의 주축이 되는 사물에 대한 분석과 관심을 소홀히 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근대 서양 사상사와의 반대의 흐름으로 볼 수 있었다.


최한기는 철학의 중심을 기에 두었다. 기철학은 인간의 감각으로 접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해답을 얻는다. 그는 의리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상업, 수공업, 의학, 유통업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이점을 살릴 개항을 주장했다. 형이상학적인 논리로 최고 권력 집단이 된 특권 세력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며 유명무실한 과거제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고로 무장한 최한기는 권력의 끈을 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당시에도 저명한 추사 김정희와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의 문하생이었다. 그의 외종조부 조인영은 최한기에게 관직에 들어올 것을 요청했다. 이는 최한기에게 일생에 둘도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명예를 훔쳐 벼슬을 취하는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최한기의 기철학은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비주류이고 용납될 수 없었기에 그가 스스로 벼슬길을 포기했으리라 짐작하는 분석도 있다.
 

최한기가 관직에 나아가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파했으면 한국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역사에 남긴 학술적 흔적은 계속 연구되고 있고, 어떤 인물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추적되고 있다. 최한기라는 한 근대인의 정체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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