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최장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7.10.31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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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최장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한국 의회정치의 초석이 된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다


 

▲ⓒ국가기록원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장

우리나라 근대 법률 전문 인력 양성의 보고는 조선 말기 법관양성소였다. 법관양성소는 국가의 사법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당시 정부가 조직한 교육기관이면서 그곳에서 수학한 인사들이 항일정신을 싹 틔운 곳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홍면희(洪冕熹, 1877~1946년)는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법률전문가로서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화합을 위해 동서분주했던 인물이다. 그는 홍진(洪震)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가세가 기운 명문가 풍산 홍 씨의 출생인 홍진은 일찍이 부친을 잃고 편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강의 침탈로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직시했다. 그는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법관으로서의 자질을 기르고 한성평리원 주사, 평리원 판사를 거쳐 충주재판소 검사가 되었다. 당시 법학은 조선에서 가장 서구적으로 전문화된 학문이었고, 법학을 익히고 검사가 된 홍진은 미래가 보장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나자 그는 검사직을 사직하며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홍진은 검사 사직 후 변호사가 됐다. 그는 일본의 부당한 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데 열중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홍진은 거국적으로 발생한 민족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관리할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일본에게서 독립해 근대적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임시정부가 시급하다는 그의 판단이었다. 홍진은 3.1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 주요 인사들과 회합을 하고 ‘한성정부’의 수립을 논의했고, 곧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정부의 조직과 조각구성을 결정하는 총 책임을 맡았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됐고, 지도부는 4월 23일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이 법통을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 홍진은 ‘정통성은 한성정부, 위치는 상해’라는 합의를 가장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성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했다. 홍진의 주장이 관철돼 일치단결된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홍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후, 임시의정원 의원, 법제위원장, 임시의정원 의장(지금의 국회의장)으로 활동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홍진은 가장 오랜 기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의회정치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임시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도 홍진의 큰 공헌입니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홍진은 법무총장, 내무총장, 외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이승만을 탄핵한 이듬해인 1926년에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이 돼 침체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임시정부를 마지막까지 지킨 독립운동가

3.1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빈곤한 자금력과 구성원간의 반목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초기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정부의 노선을 두고 갈등이 일었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계파와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계파 등 크게 두 축으로 나뉘었다. 홍진과 함께 임시정부 내 대립을 우려하는 인사들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지관으로 위치시키는 동시에 구성원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대립은 첨예화됐고 임시정부는 약체화됐다. 한때 이에 실망한 홍진은 법무총장직을 내려놓고 은거하기도 했다.

후기로 갈수록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좌우대립 문제는 임시정부의 갈등 주제가 됐다. 걸출한 독립운동가들도 반목과 대립의 임시정부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어느 한쪽이 진영을 택하기도 했다. 홍진은 이러한 대립에 반대하면서 좌우 통합을 위해 경주하기도 했다. 홍진은 1926년 국무령을 맡을 당시, ‘시정 방침 3대 강령’을 제시하며 민족유일당 운동을 촉발시켰다. 주요 내용은 당시 국내에서 자치론을 주장하던 이광수, 최린 등 일제 타협주의자와 특정한 이념성이 강한 조직운동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한편, 국무령직에서 내려온 1927년, 그는 좌익의 대표적인 인물인 홍남표와 함께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하며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민족유일당 운동을 지원·전개했다. 홍진은 직접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이 돼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노본(勞本)경제의 조직, 인본(人本)문화의 건설 등 좌우의 균형이 잡힌 강령을 내세우며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홍진은 한국독립당의 군사조직인 한국독립군의 총사령관 이청천과 함께 협력해 만주에서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9월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본의 끈질긴 공세를 피해 난징(南京)으로 한국독립당의 본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도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하던 한국혁명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을 창당했고, 김원봉의 의열단, 좌파계열의 조선혁명당, 임시정부계통의 한국독립당(홍진이 창당했던 한국독립당과 별존), 김규식의 대한독립당 등과 합당해 민족혁명당의 문을 열었다. 중일전쟁 중 내륙으로 확장하던 일본을 피해 거소를 옮기는 임시정부를 따라 다시 임시의정원 의장에 재선되고 국무위원으로 선임되며 어려운 시기에 항상 임시정부에 힘을 보탰다.

일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대일투쟁과 민족통합을 경주한 홍진은 독립된 조국 땅에 돌아왔다. 귀국 직후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에 반대한 그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던 중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한시준 교수는 “홍진은 임시정부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인데,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던 인물들을 주목해주십시오”라며 홍진을 이슈메이커의 11월 역사인물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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