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과 출신을 극복한 여성 사업가, 김만덕
성별과 출신을 극복한 여성 사업가, 김만덕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7.10.01 0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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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성별과 출신을 극복한 여성 사업가, 김만덕

구휼사업으로 정조 시대 모범이 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올해 38회째를 맞이하는 만덕제를 탐라문화제에서 분리해 독립적인 행사로 발돋움시키기로 했다. 만덕제는 조선 정조 시대, 태풍 피해로 기아상태에 빠진 제주도민에게 구휼미를 기부해 나눔을 실천한 제주 출신의 여성 거상(巨商)인 김만덕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다. 일각에서 제주신공항을 ‘김만덕 국제공항’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나올 만큼 제주도민의 김만덕 사랑은 각별하다. 시간을 되돌려 거상 김만덕의 생애를 살펴본다.

 

조선 후기 유통경제의 발전을 이끈 여성 거상

조선 정조 시대는 전근대 한국 역사 중 지역 간 유통경제가 가장 발달했던 기간이다. 정조가 중용한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은 삼정승 자리를 두루 거쳤고, 억상정책을 펼쳐온 조선에서 자유로운 상업을 대폭 인정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이끌어 내어 자유로운 유통경제가 활성화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조 시대 ‘여당 대표’였던 그가 전기까지 써주며 칭송했던 이가 있었다. 그 인물은 제주 출신인 여성 거상 김만덕(金萬德, 1739~1812년)이다. 

양인의 딸로 태어난 김만덕은 12세 때 양친이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해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외삼촌 집에 맡겨졌다. 두 오빠는 계속 외삼촌 집에서 지낼 수 있었던 데 반해, 김만덕은 은퇴한 기생 월중선의 수양딸로 보내져 기생이 됐다. 이는 조선 후기 남존여비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행히 친가가 가문의 명예를 이유로 기생이 되는 것을 반대한 덕분에 김만덕은 양인의 신분을 회복했고 상업에 뛰어들게 됐다. 

그는 지금의 관점에서 중간 유통 상인 정도 되는 객주(客主)가 됐다. 객주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에서 운송업, 숙박업, 금융업 등에 종사하며 유통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들은 주로 위탁받은 물건을 매입자에게 판매하고 대금을 위탁자에게 인도한 대가로 수수료인 구전(口錢)을 받았다. 김만덕이 부를 축적한 과정을 자세히 전하는 기록이 없지만, 간접자료를 통해 그가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유통업계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며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재산만큼 든든한 제주도민의 신망까지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의 신분으로 제주도의 거상이 된 김만덕을 시기한 다른 객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만덕을 부정축재자로 허위 신고했으나, 제주도민들이 상소를 제출한 덕분에 풀려났다.
 
 

선행을 계기로 국왕을 알현할 특권을 얻다

1795년, 제주도 출신 김만덕의 명성을 전국구로 알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태풍이 제주도를 휩쓸면서 현지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도 바다에 침몰해 제주도민은 생존에 큰 위기를 겪었다. 김만덕은 육지에서 구호미 500섬을 구입해 난민들의 주린 배를 달랬다. 그의 구호미 기증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다.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기사는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제주 목사가 보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관료와 유학자들은 김만덕의 선행을 높이 평가했다. 채제공은 기생 출신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萬德傳)>을 집필했고, 정약용은 그의 구호 사업을 칭찬하는 글까지 남겼다. 정조가 아끼는 관료와 대학자가 김만덕에게 박수를 보낸 것이다. 그의 선행에 감동한 정조는 제주 목사를 통해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었다. 이에 김만덕은 “한양에 가서 전하가 계신 궁궐을 바라보고,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고, 여행길은 정조의 배려 덕분에 편리했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진 김만덕을 보러 나온 백성들로 찼다. 조선 초까지 반독립적이었던 제주도 태생이자 기생 출신 여성으로 국왕을 알현한 사건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만덕을 기리는 만덕제, 10월 22일로 지정

금강산 유람을 마친 김만덕은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사업을 이어나갔고 1812년 고향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은 ‘양아들에게 생활비를 조금 남기고 모든 재산은 제주도의 빈민에게 기증하라’는 것이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1980년부터 매년 개최한 ‘탐라문화제’에서 김만덕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만덕제’를 분리해 올해부터 탐라문화제와 독립된 행사로 격상했다. 헌신적인 노력으로 봉사에 앞장서거나 경제활동을 얻은 이윤을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 이들을 대상으로 ‘김만덕상’을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탐라문화제

 

조선사 관련 저서와 언론 논평에서 김만덕에 대한 애정을 밝혀온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는 조선 시대에 일반 여성이 최고의 국정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김만덕은 조선 여성사를 풍부하게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경제, 사회 분야에서 성별 격차가 크다는 언론의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지금도, 거상 김만덕과 같이 성별과 출신에 굴하지 않는 여성들이 많다. 현대판 김만덕이 재능과 열정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만큼 사회도 정조와 채제공, 정약용처럼 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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