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한미 FTA
4년 4개월 만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와 일부 산업계에서는 이번 결정을 반기고 있지만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농·축산업 분야에서는 정부가 제시한 보상대책에 실효성 문제를 제기하며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연평균 27억 8천만 달러 흑자 예상
한미 FTA가 발효되면 자동차를 비롯한 공산품과 농축수산물 관세가 사라져 한-미 간 교역은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하지만 일부 민감한 품목이나 공공 서비스는 FTA 협정이 적용되지 않거나 유보된다. 양국은 원칙적으로 모든 상품에 대해 관세를 철폐하게 된다. 관세가 즉시 사라지는 품목은 섬유·농산물을 빼고 한국이 7,218개(85.6%), 미국이 6,176개(87.6%)에 이른다. 대표적 교역상품인 승용차의 경우 단계적으로 관세가 철폐된다. 우선 미국이 국산 수입차에 대한 관세 2.5%를 즉각 없애고, 한국은 현재 8% 관세를 4%로 내린 뒤, 4년 후에는 완전히 없애게 된다. 다만 전기자동차는 미국이 관세 2.5%를 4년간 균등 철폐, 한국은 관세를 8%에서 4%로 내렸다가 4년간 균등 철폐한다. 화물자동차의 경우 미국은 25% 관세를 7년간 유지한 뒤 향후 2년에 나눠 없애고, 한국은 10% 관세를 바로 없앤다. 관심을 끄는 것은 특정 상품 수입이 급증하면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고 취하는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다. 양국은 자동차에 한해 상호주의 세이프가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적용 가능한 기간은 관세 철폐 후 10년이고, 최대 4년 동안 발동할 수 있다.
한미 FTA를 통해 예상되는 연평균 대미 무역수지 흑자 금액만 1조 4천억 달러, 우리나라의 전체 무역수지는 15년 간 연평균 27억 8천만 달러 흑자가 예상돼 우리나라의 성장기반 자체가 강화될 것이란 분석이다. 국내 살림살이도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한미 FTA를 통해 우리나라의 GDP는 앞으로 10년간 최대 5.66% 증가하고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35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되면서 어려운 국내 경제가 능동적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도 일고 있다. 하지만 유통이나 제약업계 같은 내수 위주의 기업과 농·축산업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고되고 있다.
15년 간 농업분야 피해액 12조 원 추정
우리나라는 세계 1·2위 농산물 수출국인 유럽연합(EU)·미국과 FTA를 체결, 농산물시장을 온전히 개방한 나라가 됐다. 정부와 경제계는 한미 FTA가 가져다줄 이익과 편익을 계산하기 바쁘지만, 농민들은 곧 현실화될 위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 초조하기만 하다. 당장 내년 1월부터 빗장 풀린 시장엔 값싼 미국산 먹을거리가 쏟아져 올 것이란 점만 명확한 실정이다. 농업 분야에서 국내에 미치는 영향이 없거나 이미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품목은 즉시 관세가 철폐된다. 품목 수 기준으로 37.9%, 수입액 기준으로는 55.8%가 발효 즉시 관세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쌀과 쌀 관련 제품은 FTA 협상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오렌지(수확기), 식용대두, 식용감자, 분유, 천연 꿀 등 국내외 가격의 차가 크거나 관세율이 높아 관세를 완전히 철폐할 경우 심각한 영향이 우려되는 품목은 현 관세를 유지하고 일정 물량의 수입쿼터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측 민감 품목인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각각 15년, 10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관세가 철폐된다.
협정문을 두고 정부와 경제계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잇따른 FTA 체결로 이미 우리 농산물시장은 이미 90% 이상이 개방된 상태여서 한미 FTA의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그간 FTA로 인한 명시적인 농업 피해는 별로 없었다며 농업계의 불안이 과장됐다고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농업분야의 심각한 피해 전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난 11월 8월 정부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산 농산물이 15년간 연 평균 4억 2,400만 달러(약 4,900억 원) 늘어나고,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농산물 생산액이 연 평균 8,150억 원, 15년간 12조 6,000억 원 감소할 것”으로 추정했다. 연평균 8,0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피해가 예상되는 농어업 분야를 돕기 위해 당초 2007년부터 2017년까지 22조 1,000억 원의 FTA 피해대책 예산을 지원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농어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현재 책정한 금액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전하며 추가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일부 관련자들은 정부가 제시한 피해대책 예산액 중 상당수는 FTA와 상관없이 농·식품부가 해오던 사업이거나, 마땅히 해야 하는 사업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사료산업종합지원(600억 원), 가축개량사업(428억 원), 살처분보상금(500억 원) 등 FTA와 무관해 보이는 항목들이 피해대책 예산 항목에 포함돼 있다는 지적이다. 한 농업분야 관계자는 “22조 원이 넘는 금액 중에 실질적으로 FTA 피해 대책과 관련된 금액은 ‘피해보전직불금’ 하나라고 봐도 무관하다”며 “나머지는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상시로 집행하는 투자 예산 성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나마 피해보전 직불금도 발동요건이 까다로워 실질적 수혜를 누리는 농어업인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농업계의 불만이 가중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23일 한미 FTA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농업 피해를 우려한 피해 보상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주문했지만, 이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산업계는 업종별 희비 엇갈려
산업계 업종별 전망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우리의 8배 규모인 미국 자동차 시장을 비롯해 전기전자, 섬유, 화학 분야 등 제조업 분야는 미국시장에서만 향후 15년 간 연평균 5억 7천만 달러의 무역수지 개선효과가 기대된다. 굵직굵직한 분야의 선전이 예상되면서 이에 따르는 부품이나 원재료 생산업계에도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수출 기업들은 내년 기업 경영 계획에 한·미 FTA 관련 사항을 적극 반영해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 선점에 나설 예정이다. 하지만 유통이나 제약업계 같은 내수 위주의 기업은 울상이다. 제약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항상 의약품 산업을 미래성장동력으로 꼽으면서도 FTA 체결을 방관하고 약가 인하를 밀어붙이는 등 위기로 내몰고 있다”며 “자칫 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될 위기”라고 경고했다. 비준안에서 주목할 대목은 특허권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복제의약품의 제조·시판을 유보하는 ‘허가특허 연계제도’. 미국 대형 제약사의 신약 특허권 강화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국내 제약사에 전적으로 불리하다. 한미 FTA 발효로 지적재산권 보호 의무가 강화되면 국내 업체가 복제약(제네릭의약품)이나 개량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정부는 복제약 시판 허가·특허연계 이행 의무를 3년 동안 유예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국내 제약산업의 충격을 덜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학과 교수는 “협정에 보장된 자료독점권 등은 사실상 특허 연장의 효과를 갖는다”며 “국내 제약산업은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소비자들의 약값 부담 역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협정에 따르면 국내 제약사가 외국 신약을 바탕으로 생산한 복제약이나 개량신약에 대해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할 경우 즉시 허가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 결국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복제약이나 개량신약은 중단 기간만큼 출시가 늦춰지거나 생산 자체가 무산돼 결국 소비자들은 비싼 오리지널 약을 구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신성장동력을 사실상 포기하는 꼴
자동차와 방송·통신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분야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조업을 제외한 농축수산·제약·방송·영화·지적재산권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생산과 소득이 감소한다. 제조업 중에서도 전기전자·섬유·철강은 영향이 미미하고, 기계·화학 업종은 무역 적자가 예상된다. 자동차 산업의 연평균 흑자(6억 2,500만 달러)가 전체 무역흑자(5억 7,300만 달러)를 웃돌 정도로 산업별 이익 균형이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쪽 셈법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재협상 직후 “향후 10년 동안 한국 시장으로 상품 수출만 100억~110억 달러 늘고 무역수지는 33억~44억 달러 개선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두 나라가 이번 협정의 경제 효과에 대해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사국들 수준이 비슷하면 양쪽이 득을 볼 확률이 있지만 한국과 미국같이 격차가 큰 경제권이 합쳐지면 작은 쪽이 경쟁으로 인해 도태되기 쉽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전망하는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우리 돈으로 연간 1,600억 원이고, 농축산업 등 취약 산업에 쏟아 붓는 정부 지원금은 앞으로 10년 동안 22조 1,000억 원에 이른다. 대미 흑자를 다 합쳐도 국내 산업의 손실 비용이 더 크다. 이미 미국산 농축수산물은 고율 관세를 물고도 가격 경쟁에서 국내 생산자를 훨씬 앞서는 상황이다. 정부의 취약 산업 지원이 사실상 관련 산업을 서서히 고사시키려는 ‘폐업 보조금’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통상 원칙인 ‘비교 우위’를 따를 경우,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게 농축수산업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동걸 한림대 객원교수(경제학·전 금융연구원장)는 “제약, 의료, 정밀기기, 정밀화학, 항공·우주, 소프트웨어 등 우리 경제의 차세대 산업 대부분이 미국에 뒤진다. 비교 우위로 따지자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사실상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다”라고 지적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에 이익이 있더라도 1% 대기업, 특권층에만 이익이 편중된 FTA”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현재의 FTA는 미국의 일방적 재협상으로 인해 이익균형이 깨진 것”이라며 “농민과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 등 서민들은 피해를 본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피해 산업을 위한 지원과 국내실정에 맞는 FTA 보완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후속 대책 추진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여당이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를 하면서 야당이 향후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하는 등 정국 경색이 불가피한데다, ISD 즉 국가간투자자소송제도 등 쟁점들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한 한미 FTA가 제대로 시행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일정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한미 협정은 경제적 득실에 머물지 않고 개개인의 생활까지 깊숙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기에 정부는 생존권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선 국민을 향해 물대포를 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아픔을 감싸줄 수 있는 대책마련에 고심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