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그늘,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영웅의 그늘,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 안수정 기자
  • 승인 2012.08.08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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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잃은 소방관은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
[이슈메이커=안수정 기자]

[Zoom In] 소방의 날 특집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소서.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1958년 미국의  앨빈 윌리엄 린이 화재현장에서 세 명의 어린 아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지은 시 ‘소방관의 기도’는 소방관의 희생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종 재난현장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소방공무원. 시대의 영웅으로 비유되지만, 정작 소방공무원에 대한 처우와 낡은 장비는 그들의 임무와 희생정신에 걸맞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임용 5년 내 20% 이직률, 평균수명 58세의 그림자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그리는 미술시간에 소방관을 그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그린 그림일지라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불길을 뚫고 전진하는 소방관의 모습은 늠름하기만 했다. 하지만 용기와 희생정신의 대표적인 직업군으로 아이들의 꿈이자, 국민들의 영웅으로 불리는 소방관이 평균 수명 58세, 직업 만족도 최하위, 임용 5년 내 20%의 이직률이란 오명을 떠안게 됐다. 이제는 꿈조차 꾸기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소방공무원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경기도지역 근무 중이라고 밝힌 아이디 ‘282119’는 “나 역시 수많은 현장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소방관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개차반, 죽어야 영웅이 되는 게 현실이다”며 “웃음을 잃은 소방관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연출되는 응급상황과 갖갖이 민원으로 인해 잠시의 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지만, 이들은 열악한 장비에 생명을 의지한 채 또다시 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직업만족도 최하위라는 불명예와 함께 임용된 지 5년이 안 돼 그만두는 소방관의 비율은 5명 중 1명꼴이다. 주당 40시간을 일하는 미국 소방관들의 직업 만족도가 의사나 과학자와 함께 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과 상반되는 대목이다.

 

지자체 예산 없어 장비개선, 인력충원 한계 
소방공무원의 열악한 근로 형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경찰관의 경우 국가직으로 분류돼, 중앙정부(행안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고 있으며 현재 가장 격무(部署)부서로 꼽히는 형사팀까지 대부분 4교대 근무로 개편됐다. 하지만 소방서는 지방자치단체에 예속된 ‘지방직 공무원’이기 때문에 최근 10년간 국가에서 지원하는 소방예산은 전체 예산의 1.7%에 불과한 실정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대다수의 소방서는 장비 확충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고, 실질적인 장비 노후율이 20%에 달한다. 실제로 지난 9월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안효대 의원이 소방방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소방차 출동 중 고장은 2008년 6건에서 2009년 20건, 지난해 137건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고장난 차종은 구급차 79건(48.5%), 펌프차 48건(29.4%), 구조차 12건(7.4%), 물탱크차 12건(7.4%) 등이며 고장사유는 115건(70.6%)이 노후 때문이었다. 소방방재청은 소방장비 검사·검수센터를 운영하며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밝혔으나 8월 기준 전국의 소방장비 검사·검수 인력은 15명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민국 소방관의 처우개선을 위한

▲사진제공: 대한민국 소방관의 처우개선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본부
활동하고 있는 현직 소방공무원 심정훈(38?가명) 씨는 “소방공무원은 지자체 소속이라 예산 책정 시 뒷전으로 밀리는 게 다반사다. 한정적인 예산을 가지고 여러 가지 필요한 부분에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업무환경이 열악해 질 수 밖에 없다”며 “특히 소방차량과, 장비의 노후는 소방관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현장 상황을 파악해 장비 교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방공무원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현직 소방공무원이라고 밝힌 아이디 ‘good119’는 “소방관들은 누가 가장 노후 된 차량을 몰고 나가느냐를 속칭 ‘복불복’이라 생각한다. 출동 후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 운전자에게 과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사유서를 제출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혀 이들이 처한 현실을 짐작케 했다.
인력 수급에도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소방방재청은 지난 2009년 3교대 근무체계를 조기에 정착시키기 위해 신규인력을 증원하고 소방력을 재배치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소방방재청은 2010년까지 전국의 모든 소방공무원의 3교대 실시를 약속했으며 현재까지 5,952명의 신규인력을 충원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소방공무원의 평균 3교대 근무율은 70%에 불과했고, 서울과 경기도 등은 평균치에도 못 미친다. 이들은 하루 24시간을 근무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비정상적인 2교대 근무를 하고 있으며, 비번인 날에 긴급 사건이라도 터지면 꼼짝없이 2~3일간 눈 한번 붙이기도 힘든 상황이다. 소방공무원을 사랑하는 모임 아이디 ‘출동인수아빠’는 “인력이 부족해서 소방차 한 대에 한 명의 대원이 타고 출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라며 “1인 소방대의 경우, 홀로 기계를 조작해서 진압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이 상당하다. 만약 불길 속에서 잘못될 경우 소방관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구급 분야에서도 인원 부족 문제가 발생한다며 “구급서비스를 받는 시민들이 증가하면서, 대원들의 출동 건수가 상당히 많아졌다. 구급의 경우, 재교육이 필수인데 인원부족으로 교육에 참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며 인력보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즉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피해 받는 것은 소방관에 국한되지 않고,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생명위해 목숨 걸었지만, 국가와 시민은 외면
현행 소방공무원법에는 소방공무원으로 화재 진압이나 구조·구급 또는 이와 관련된 업무, 교육훈련 중 사망했을 경우에만 순직 군경으로 간주한다. 반면 주민 신고 등 대민지원 요청을 받고 현장에 나갔다가 순직할 경우에는 순직 군경이 아닌 순직 공무원으로 처리된다. 순직 군경으로 인정되면 고인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자녀를 둔 배우자에게는 매월 94만8000원의 보훈연금과 함께 매월 110만원의 위험순직 유족연금이 지급된다. 또 배우자나 자녀에게 수업료 등이 면제되거나 학습보조비가 지급되며 취업 알선 및 채용시험 때 가점 부여 등 혜택이 주어진다. 반면 순직 군경이 아닌 단순 ‘순직 공무원’으로 처리되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위험순직 유족연금 등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119안전센터 소방관들은 “주민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업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했는데 죽어서도 대우와 보상도 제대로 못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원 건물에 고립된 고양이를 구조하다 추락해 순직한 소방관의 국립묘지 안장이 늦어지는 것과 관련해 조속한 안장을 요청하는 누리꾼들의 목소리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관련 법 개정이 추진됐다. 이로 인해 단순 생활민원에 대해서는 소방관이 출동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9월 9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개 고양이 같은 동물 구조, 현관문 개방 등 생활민원 신고 및 출동 건수는 전과 다름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2일 서울종합방재센터에 따르면 개정안 시행 후 9월 말까지 서울 소재 소방서에 접수된 동물구조 신고 837건, 단순 문 개방 요청 377건 등 생활민원성 신고가 1,200여건에 이른다. 실제로 황당하고 위험한 동물 구조 민원에 출동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전 동구의 한 소방서 관계자는 "지붕 속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데 해결해달라는 신고가 많았다"며 "천정 위에는 튀어나온 못과 여기저기 잘린 전깃줄이 가득해 부상, 감전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고양이를 구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고 말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한 생활 민원성 신고가 끊이지 않자 소방관들의 스트레스와 피로는 극에 달하는 실정이다. 방재센터 관계자는 "신고를 받은 후 주간에는 20초, 야간엔 30초 내에 출동을 개시해야 하는데, 잦은 생활 민원에 구조대원들의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막심하다.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소방관도 상당하다"고 전했다. 또 이로 인해 화재 등 정작 중요한 재난 현장엔 제때 출동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대전소방서 김재훈(31?가명) 소방관은 "먼저 출동한 현장의 상황을 처리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소방서로 복귀할 수 없어 정작 도움이 필요한 곳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며 "시민의식 수준의 향상이 필요하지만 민원성 신고도 허위신고에 준해 과태료 부과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방공무원 3명 잇따라 자살하는 등 대책마련 절실

소방방재청의 2010년 자료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1천642명의 소방공무원이 공무상 사상을 당했다. 한해 평균 328명에 달하는 숫자다. 현재 소방공무원의 업무 스트레스 지수도 공무원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소방학교 소방과학연구실 한동훈 연구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장업무 관련 직무 스트레스 지수가 소방관 54.4점, 경찰공무원 46.5점, 해양경찰공무원 43.5점 순으로 조사됐다. 이는 내근직 공무원에 비해 스트레스 점수가 비교적 높은 경찰공무원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특히 소방관이 동료나 지인 사망 현장에서 신체 일부가 훼손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등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체험을 한 이후에는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동국대병원 안연순 교수는 “소방관은 수면 부족, 교대근무 등 업무 성격상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이런 영향으로 개인적인 문제나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소방공무원들이 흔히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신체적인 손상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고에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뒤에 나타나는 질환이다. 특히 최근에는 한 지방자치단체 내에서 소방관 3명이 잇따라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일각에서는 직무로 인해 발생된 외상 후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가 크게 부각되자 소방방재청은 현재 소방공무원 정신건강 관리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해 나가고 있지만,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소방발전협의회 장재완 회장은 “소방공무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쉽게 노출 되고 있으며 그 수가 점차 늘고 있는 실정이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조직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며 “최근 각 시ㆍ도 소방본부별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관련한 순회교육 및 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좀 더 조직적인 차원에서의 현실적 대책마련에 주력할 때입니다.”라고 주장했다.
119는 온 국민을 위한 복지다. 노후 소방장비 및 119 단순 민원 거부는 곧 온 국민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라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더불어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웅의 그늘에 가린 소방관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지원에 고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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