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9.05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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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일평생 조국 위해 헌신한 여걸, 그러나 유해조차 찾지 못 해

 

▲음력으로 1922년 4월 8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조마리아 여사의 회갑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흰 한복을 입은 사람이 조마리아 여사이다. ⓒ국가보훈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영웅이자 국민이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 든든한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마리아는 장남 안중근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자녀들을 도와 민족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협조했고, 안중근이 순국한 이후에는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동포들 간에 분쟁을 중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돼준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를 담아봤다.



 

“나라를 위해 죽으니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못 만나는 것이 애석하구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일제는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에 조마리아는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라며 일제가 내린 판결에 거세게 반박했다.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조마리아는 당대 최고의 여걸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가 다른 형제들을 통해 “중근이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전한 대목에서 자식보다는 조국의 안위를 먼저 위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안중근을 변호한 안병찬 변호사의 입을 빌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전해 사랑하는 자식을 사지에 내몰아야 했던 어미의 심정을 내비추기도 했다.


 

​​안 씨 집안 독립운동에 든든한 조력자

조마리아(본명 조성녀)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 배천 조씨와 원주 원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뼈대 있는 명문가에 자제였다. 동갑내기 안태훈과 혼인한 그는 슬하에 장남 안중근,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하고 청산리전투에 기반을 확립한 차남 안정근, 한인애국단을 운영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킨 삼남 안공근, 독립군 군복 제작에 헌신한 딸 안성녀를 둬 독립군의 어머니로 칭송받았다. 실제 조마리아는 네 남매에 독립운동을 뒤에서 든든히 지원해준 조력자였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 중이던 안중근에게 시부 안인수의 유산을 건넨 것도, 안중근 형제들이 민족교육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경제적 지원과 정신적 독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서 1907년 5월 안중근을 필두로 안정근과 안공근도 국채보상모금에 뛰어들자 그는 아들들에게 힘을 보태주고자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에 은제품을 납부하기도 했다. 


 

조선의 어머니로 거듭나다

1910년 5월 식솔들과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한 조마리아는 안창호의 도움으로 1911년 4월 동청철도 동부선상의 목릉(물린) 팔면통에 정착한 이후에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20년 1월 30일에 발간된 《독립신문》은 그가 러시아로 망명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바이칼호수로 이동하며 동포들의 민족 양성사업에 종사했다고 전했다. 안정근과 안공근이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는 동안 나콜리스크에 머문 조마리아는 1922년 4월 동포들의 환대 속에 회갑잔치를 치른 이후 상해로 이주해 아들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포들 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는 조마리아의 평소 성품이 어떠했을지 짐작케 했다. 그는 가정형편이 궁핍해졌음에도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이 때문에 안창호가 추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과거 서경덕 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에도 자식의 죽음보다 조국과 민족을 먼저 생각한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다시금 기릴 수 있는 날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한 조마리아 여사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됐으나, 애석하게도 도시개발로 묘지 터가 개발돼 건물이 들어서면서 무덤 역시 자취를 감췄다. 안 씨 집안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 조마리아 여사는 자신의 이름 석 자보다 안중근의 어머니로 더 유명했다. 이제는 조마리아 여사를 개인적인 업적 평가를 통해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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