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안정된 지위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간호사
박자혜, 안정된 지위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간호사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7.09.0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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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박자혜, 안정된 지위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간호사

 

독립된 조국에서 약속한 가족의 만남을 보지 못하다

 

 

 

고등교육을 받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력을 가진 여성은 많이 발굴되지 못했다. 주로 일제의 선전도구의 역할을 한 인물들이 주목돼 왔다. 박자혜는 의사가 되기 힘든 시대에 간호사로 근무했던 엘리트였고, 간호계 독립운동단체 간우회를 이끈 인물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이에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의 부인으로서 박자혜의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더 늦기 전에 대한민국을 살리려 하다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궁에서 업무를 수행한 궁인들은 궁을 나갈 수 있었다. 현대인은 궁녀가 궁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궁을 떠난 궁녀는 경제 위기 중에 실직당한 처지와 같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박자혜도 중인 출신의 아기 나인으로 입궁해 10년간 궁녀로 있었다. 일제가 선포한 이왕직관제에 따라 해직된 박자혜는 학업에 대한 열정이 있어 숙명여자중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에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장차 산파가 될 준비를 했다. 산파는 조선시대부터 경륜 있고 침착한 여성이 가지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당시 단순한 물건을 파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전문적인 의료인으로 통했다. 졸업 후 조산부 자격증을 얻고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근무하게 된 박자혜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전문 의료인이었다. 당시 일본이 문화통치를 시작하기 전, 조선인이 의예과에 진학하기 힘들었다. 당시로써 의료인으로 밟을 수 있는 출세 코스를 밟았다고 볼 수 있다.
 

박자혜가 경력을 쌓아가고 있을 당시,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일본의 통치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국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종로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박자혜는 일본 군경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목도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해 간호사 독립운동단체 간우회를 설립했다. 그는 10여 명의 간호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해 만세운동의 동참을 촉구했다. 윤정란 한국여성사학회 총무이사는 박자혜를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안정된 삶을 포기한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전국적으로 타올랐던 만세운동이 일본 군경에 의해 무참히 진압됐듯이 박자혜와 동지들도 체포됐다.

 

단재 신채호의 짝 그리고 고된 삶
 

일본 군경에 체포된 박자혜는 총독부의원장의 조치로 풀려났으나, 더이상 병원에서 일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신채호와 친분이 있던 우응규의 도움으로 연경대학 의예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해 간호사로서의 경력이 단절됐던 그에게 인생에 있어 좋은 기회였다. 학교에 다니던 박자혜는 만주독립운동가의 대부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만나 혼인을 맺었다. 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었던 그에게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사는 일은 고됐다.
 

약간의 원고료와 지원금으로 지내는 신채호의 주된 활동은 독립운동이었다. 결혼 후 1년 만에 탄생한 큰아들 신수범은 복덩이었지만, 가난한 부부는 기쁠 수만은 없었다. 그 1년 뒤, 둘째를 임신한 박혜자는 신채호의 권유로 국내로 돌아왔다. 박자혜는 국내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전공을 살려 인사동에 산파 박자혜라는 조산원을 열었다. 조산원은 변변한 시설을 갖추지 못한 곳이었으나, 박자혜는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아들을 길렀다. 동시에 조국의 광복과 남편의 귀환을 기원하며 독립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했다.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 지리에 어두웠던 나석주가 의거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안내했고, 남편이 가담하고 있던 의열단의 내부 연락을 도왔다.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와 우리말을 연구하는 조선어학회를 찾아 활동하기도 했다. 신채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바 있었고 일본 군경을 가장 곤란하게 했던 의열단에 가담했기에, 아내 박자혜는 사정 당국의 제1 경계대상이었다.
 

박자혜에게 일본의 감시보다 더 힘든 것은 남편 신채호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1922년 남편 곁을 떠나 국내로 왔던 그는 5년 만인 1927년 중국에서 남편을 만난 이후 '살아있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남편이자 아버지 신채호는 하루, 반나절조차 한 자리에 머물렀다가는 체포될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기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리라. 독립을 두 분으로 보지 못한 채 1928년 체포돼 1936년에 뇌출혈로 인해 신채호가 사망하고, 둘째 아들 신두범이 1942년 절명하며 단란한 가정의 재결합은 실현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 사후 이듬해 오십도 되지 않아 사망한 박자혜에게 국가는 47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상을 추서하며 그의 노고에 감사함을 표현했다. 박자혜라는 인물이 조명받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아직 많은 독립운동가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나, 우리의 무관심으로 무명의 상태에 있다. 그들의 헌신에 대해 감사함을, 그들의 후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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