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에 담긴 역사
광화문 광장에 담긴 역사
  • 박지훈 기자
  • 승인 2017.07.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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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시민의 장으로 돌아온 광화문 광장
[이슈메이커=박지훈 기자]

 


소통과 시민의 장으로 돌아온 광화문 광장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맞이하며 광화문 광장을 돌아보다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말하며 업무 후 시민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광화문은 조선 개국 이래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서울의 상징인 동시에 국민과 국가권력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살펴본다. 

 

 

 

조선시대 권력투쟁의 장이 된 광화문

조선 태조는 조선 왕조를 창업한 후 급하게 고려의 송악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는 고려가 500년 동안 수도로 삼았던 송악에 계속 머무르기 힘들었다. 당시 송악이 수도로 부적합하다는 도참설(圖讖說)도 유행하기도 했다. 태조는 정도전을 새 수도 건설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신궁이 완공되기도 전에 천도했다. 행정과 방어를 위한 수도건설 작업은 생각보다 빨리 완성됐다. 한편, 상업으로 발달했던 송악과 같은 상업지구의 구축은 부족했다. 태조의 명으로 현 광화문 앞 세종대로, 종각과 동대문으로 향하는 종로의 양 옆길에 상인들의 상행위를 위한 점포를 지었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의정부의 관아가 들어섰고 이 지역은 현재 육조거리라는 역사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태조는 훗날 정종이 되는 방우, 태종이 되는 방원을 후계자로 선택하지 않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창업의 공로가 막대했던 이방원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소생들의 사병을 빼앗으려는 정도전의 사병혁파를 기화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당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태자 이방석과 그를 둘러싼 정도전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이방우와 이방원은 자신들이 기른 정예기병을 동원해 광화문 앞 대로를 통해 광화문으로 밀고 들어왔고, 마침내 그 세력들을 제압했다. 왕자의 난 이후 용상에 오른 정종은 “한양은 형제간의 유혈투쟁이 있었던 곳”이라는 이유로 개성으로 돌아갔다. 사실상 바지 사장에 불과했던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한 후 태종은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로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이후 한양의 육조거리와 종로거리는 더욱 정비됐다.

 

 

세계 유례없는 관민 소통의 광화문

조선 시대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광화문 너머에 위치해 있던 탓에 지금의 광화문 앞 광장은 정치권력이 다툴 때마다 희생자를 낳았다. 하지만, 광화문 앞 광장은 국왕에게 억울함을 표하거나 조정이 실시하려는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백성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장이기도 했다.

태종은 1401년 광화문 밖 문루에 신문고(申聞鼓)를 달아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북을 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했다. 물론 큰 일이 아님에도 북을 쳤을 경우, 관은 엄벌을 내렸지만, 백성들은 하나의 소통 창구를 가질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주로 사대문 안에 사는 양반, 관리가 신문고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화문에서 올리는 상소 관례는 신문고 제도보다 더 조선시대에 중요했고 우리가 아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연관돼 있다. 최익현이 도끼를 맨 채 광화문 앞에 엎드려 올린 ‘지부복궐척화의소’가 대표적인 광화문 상소다. 최익현은 1876년, 조정이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하자 이에 5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를 했다. 그는 등에 도끼를 짊어지고 상소를 읊으며 고종에게 자신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으려거든 그 도끼로 자신을 참해달라고 했다. 물론 최익현은 극형을 당하지 않고 1906년 일본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되기 전까지 꾸준히 언론, 의병활동을 펼쳤다.

조선은 유교가 정치, 사상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였다. 불교가 종교로 인정받기는 했으나, 조선사 내내 비주류였고 탄압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봉건적 폐습을 비판하고 인간평등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사이비 중 사이비였다. 동학이 점점 세력을 넓히자 조정은 동학의 교주 전봉준을 체포해 극형에 처했다. 이후 동학 지도자는 당시 민중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조직운영을 운영하며 신자를 크게 늘렸다. 점차 세력이 광대해지면서 동학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을 회복하고 동학을 정식 정교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자 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광화문 앞 거리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상소문을 읇으며 통곡을 했다. 이것이 동학교도 복합상소다. 그들은 조정이 당시 외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기독교를 용인하는데, 왜 우리의 종교 동학은 안되냐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을 던졌다. 이 상소 집회는 조정이 “일단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면 원하는 바를 고려해보겠다”라고 말하자 해산했다. 

이처럼 광화문 앞 광장에서 상소를 하는 것은 국가가 용인한 소통의 관례였다. 상소의 내용이 지극히 왕의 실정을 지적하는 경우, 작성자가 간혹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격한 상소하더라도 상소자들은 군에 의해 광화문에서 밀려날 뿐이었다. 조선의 왕들도 광화문 상소는 민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상소를 낸 사람은 관료로 뽑히거나 이미 관료인 경우 특진했다. 조선이 군주제였던 것을 고려하면, 광화문 상소는 세계 유래 없는 관민 소통이었다.



 

상처 치유의 장

2014년 4월 13일 인천에서 제주로도 향하던 유람선 세월호가 목포 앞 바다에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침몰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사고의 진상을 요구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부에 의견을 전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고자 했다. 그러한 시도는 청와대 인근의 사복경찰에 의해 저지됐다. 경복궁이나 청와대 인근에서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 배지를 착용한 사람들은 사복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거나 통행을 제지당하기도 했다. 2014년 세월호 학생들과 같은 학년의 김 모군은 “세월호 배지를 착용한 채 경복궁의 북쪽 문인 신무문을 구경하러 가던 중 사복경찰의 제지를 받았고 도리어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사복경찰은 통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합리적 이유를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비합리적인 현상은 비단 정부에 의해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농성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속히 규명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은 이를 지지하며 단식투쟁에 동참했다. 이에 극우성향의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의 회원들은 유가족의 단식투쟁에 맞선다는 이유로 폭식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자식과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유가족들이 곡기를 끊은 현장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었다는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정부와 일부 시민들이 벌인 비정상적인 행위와 비교되는 사건이 같은 해 8월 일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한한 것이다. 교황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유언에 따라 천주교식으로 치르다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죄로 참형을 당한 윤지충을 비롯한 124명의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복자로 추존하는 시복식을 광화문 광장에 열었다. 교황은 당시 광화문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 희생자의 아버지 김영호 씨를 위로했다. 광화문에서 농성하던 유가족의 면담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때 모습을 드러냈다.


2016년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제기되며 광화문 광장은 다시 촛불집회의 열기로 불타올랐다. 촛불집회는 매우 평화적인 방식으로 일관했다. 조합의 지도부가 주도하던 집회의 방식이 시민 참여형으로 변화한 결과로 분석된다. 의회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키자, 경찰은 무리하게 시민과 충돌하지 않았고 이에 시민은 법을 준수하고 집회 후 길거리를 치우며 공권력의 배려에 화답했다. 평화롭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촛불집회가 계속되자 더욱 많은 시민들이 동참했다. 마침내 촛불집회는 총 23차례 연인원 약 1,600만 명이 참여한 시민참여 집회로 기록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에 따라 탄핵되고, 5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며 국민들은 소통의 리어십을 갈망하고 있다. 이전 정부와 같이 불통정부가 아닌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소통의 거버넌스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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