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Ⅰ]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기록 Ⅰ]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7.01 0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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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 이야기
[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올바른 정신 기초해 붓 끝에 사활을 건 이들

 

▲ⓒ우리역사넷

 


오늘날 9급 공무원과 같은 사관(史官)들은 조선시대 기껏해야 7품에서 9품 정도에 벼슬아치였다. 오로지 붓 하나에 의지해 사초(史草)를 직필(直筆)해온 이들은 당시 관리들의 시기와 권력자들의 견제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직필에 자신들의 사활을 내걸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올바른 기록에 대해 재고(再考)했다. 

 


사관(史官), 그들은 누구인가?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거머쥔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과녁놀이와 사냥을 매우 즐긴 인물로 전해진다. 그런 그가 1404년(태종 4년) 대신들의 반대에도 노루사냥을 나가 말에서 떨어진 적 있다. 그때 태종은 함께 사냥을 나선 신하들에게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사관 민인생이 태종의 말까지 모조리 사초에 기록해 태종실록에 남겼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태종과 그가 가장 싫어했던 인물로 알려진 민인생 사이에 유명한 일화는 또 있다. 과거, 사관 홍여강이 편전에 숨어들어 태종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자 이를 문제 삼아 그를 내쫓은 태종이 홍여강처럼 편전에 숨어든 민인생에게 “비록 대전 밖에 있더라도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라 말했다. 이에 민인생이 태종에게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라고 직언했다. 이후 태종이 사관들의 궁궐 출입을 금하자 사관들은 왕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기 위해 병풍 뒤에 숨거나 얼굴을 가리고 몰래 입궁하는 등 직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사관들의 이러한 집념에 두려움을 느낀 건 연산군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연산군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다”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 역사를 사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 중종 때 대신들은 규정상 사관이 드나들 수 없는 규문에 기록을 담당할 여성 사관을 둘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당대 권력자조차 어쩌지 못한 말단직 한림(翰林)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크게 예문관 소속 사관과 춘추관 소속 사관으로 나뉜다. 춘추관 사관은 ‘겸춘추’라고 하여 평소에는 소속 관청에서 각자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다가 실록청이 구성되면 겸춘추로서 사관의 역할을 다했다. 때문에 겸춘추는 당시 중요 관청에서 요직을 맡은 대신들이 도맡았다. 반면, 예문관 소속 사관들은 봉교·대교·검열 관직을 가진 7~9품의 벼슬아치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인 것이다. 한림(翰林)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들은 곧은 절개를 과감한 직필을 위해 과거급제자 중 인재로만 구성됐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관은 약 60여명인데, 그중 겸춘추가 52명, 한림이 8명이었다. 즉, 소수만이 한림이 될 수 있었기에 조선시대 사관이라는 벼슬은 굉장히 명예로운 자리였다. 그 대신 사관들은 권력자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실제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은 실록을 자주 열람하려고 해 문제가 됐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도 사초를 들여다보려해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친 적 있다. 이러한 이유로 사관은 사초가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에 목숨을 걸었는데, 이 때문에 실록이 편찬되면 사초를 물에 씻는 세초(洗草) 작업을 거쳤다. 여기서 사초(史草)란 실록을 편찬하기 이전 개인적으로 기록한 자료로, 실록청에 꾸려지면 사관들이 무기명으로 사초를 제출했다. 원칙상 사초는 사관들이 직필할 수 있도록 무기명으로 제출하는 게 맞지만 작성자를 밝히라는 일부 권력자들에 의해 직필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저자의 심술(心術)에서 비롯된 올바른 기록

그 당시, 사람들은 ‘삼장(三長)을 갖춘 자’가 가장 이상적인 사관이라 여겼다. 여기서 삼장은 재지, 학문, 식견을 일컬으며, 이후 저자의 심술(心術)을 뜻하는 덕이 추가돼 사장(四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 사관 등용을 탐탁지 않았던 태종조차도 사관을 선발할 땐 덕을 우선시했는데, 이는 권력에 아첨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추호석 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은 “연산군 때 사초(史草)가 공개되자 엄청난 옥사가 발생했습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도 함부로 공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라고 전했다.
 

  붓 하나에 의지해 직필을 생명처럼 여긴 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었던 직책 사관. 직필을 통해 바른 역사를 후대에 전달하려 했던 이들의 정신이 기록을 축소·봉인·폐기하는데 거리낌 없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말의 양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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