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1,400년을 맞이한 한국 불교의 큰 스승
탄신 1,400년을 맞이한 한국 불교의 큰 스승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7.05.04 2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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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탄신 1,400년을 맞이한 한국 불교의 큰 스승

스스로 한계 깨버린 파격적 사상가이자 수행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신라 요석공주와 극적인 사랑, 이두를 만든 설총의 아버지로 유명한 원효대사. 올해 탄신 1,400주년을 맞이한 원효대사에 대한 학술대회가 기획되고 개최되고 있다. 특히,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불교에도 영향을 미친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화쟁, 일심 가르침에 대중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불교의 통합과 대중화에 힘쓰다
올해 탄신 1,400주년을 맞이한 원효는 당대의 천재적인 사상가로 동아시아에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고려 중기를 지나 조선 시대에는 잊힌 존재였던 그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남짓이다. 현재 원효가 집필한 100여 종의 책 중 현존하는 것은 20여 종이고 그나마 완본은 3~4종에 해당하며 판본 대다수가 일본에 있다. 이처럼 가까이 있었지만 잘 알지 못했던 원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 출신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15세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 승려가 되었고,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裟羅樹) 곁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낭지(朗智)와 혜공(惠空) 등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완산주에 머무르며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던 고구려의 승려 보덕(普德)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 등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한 명의 스승을 정해 놓고 배우지는 않았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의상과 함께 두 번째 유학을 가던 원효는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 잠시 쉬게 되었다. 원효는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없도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이후 분황사에 거처를 마련한 원효는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원효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했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효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전해졌다.


 

 

 


 

화쟁(和諍)과 일심(一心)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해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원효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했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 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른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해심밀경, 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했다. 이처럼 학문에 제한이 없는 원효는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해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런 그의 사상을 화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은 바로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각 종파 간의 논쟁의 화해를 추구하기 위해 자기 종파와 사상만을 최고라고 고집하지 말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종합해야 한다는 ‘원융회통’을 강조했던 원효. 탄핵정국 이후 이념을 넘어 대립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한국사회에 불교의 대중화와 신라 불교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했던 그의 자세를 되새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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