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기준과 관점, 국민과 언론에게 묻고 싶다
막말과 독설로 대표되던 방송인 김구라(41)씨가 19대 총선으로 불거진 김용민(39)후보의 막말 파문으로 인해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자숙에 들어갔다. 김용민은 19대 총선 기간 중, 김구라가 진행하는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고 총선의 패배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리도 모르는 막말이 순환되고 있고 이러한 책임을 김구라와 김용민에게만 전가하는 것으로 그 고리를 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막말의 근원과 기준 설명할 수 있나
19대 총선은 새누리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새누리당의 승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민주통합당의 자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자멸이 맞다면, 그 자멸의 중심에는 ‘막말파문’을 일으킨 김용민이 자리하고 있다. 김용민의 막말파문은 민주통합당의 선거결과 뿐 아니라 인기 방송인 김구라가 그에 따른 희생양이 되어 모든 방송을 하차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당시 김용민이 막말파문을 일으켰던 인터넷 방송의 진행자가 바로 김구라였기 때문이다.
흥미위주의 막말을 중심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인기를 얻었던 김구라는 막말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슈가 되자 그 모든 화살을 자신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김구라에게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막말에 대한 파문을 잠재우려는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김구라가 공중파 데뷔 전 김용민과 같은 막말로 인터넷 방송에서 활동한 것은 잘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희생양으로 치부될 이유는 없다. 공중파 데뷔 이후 그의 막말은 다분한 오락적 요소로 어떤 연예인들은 김구라의 막말을 빌어 자신을 홍보하기도 했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의 막말이 전해질 때마다 인상을 쓰기 보단 웃음을 보였다. 김구라가 막말로 인해 방송을 하차했어야 했다면 그 시기는 지금이 아니라 훨씬 이전이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막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라고 규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 또한 어디까지가 막말이고 그러한 막말이 허용되는 기준은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막말의 잣대는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내릴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언론 역시 막말에 대한 규정을 정해놓고 그 허용치의 범위를 두고 누군가는 비판하고 누군가는 감싸고 있는 것인지, 정치인들이 국회나 청문회에서 쏟아낸 막말은 그 대가를 치루지 않고도 항상 통용되면서 한 방송인의 막말은 심판을 받고 모든 걸 내려놔야 하는 규정이란 대체 있었는지에 대해서 한 번 묻고 싶다. 어느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막말을 통용시키다가 어느 순간이 되서는 막말을 진짜 막말로 간주해서 비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말에 대한 근원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난센스다. 우리사회에 정확한 막말의 잣대 역시 없다. 막말이란 것이 정확한 잣대를 세운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다. 남의 대한 배려는 접어두고 자신의 생각과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그들의 세태가 바뀌지 않는 이런 모습들이 점차적으로 사회에 파급된다면 그 답습효과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책임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 언론이 김구라를 비판하듯 막말에 대한 기준이나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 정치인들이 하는 막말도 그 기준을 바탕으로 비판하고 끄집어내서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환생경제, 그리고 나는 꼼수다
김용민의 막말 파문이 터지자 여당과 보수 언론들은 김용민과 그가 제작하는 <나는 꼼수다>에 대해 철저한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8년 전 <환생경제>로 맞불을 놓으며 똑같은 비방을 시작했다. <환생경제>는 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대표 박찬숙.66)의 첫 공연작이자 정치풍자극이다. 당시 <환생경제>의 대사를 살펴보면 김용민의 막말에 준하는 자극적인 대사로 故노무현 대통령을 비방하고 있다.
<나는 꼼수다>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의 ‘1억 피부숍 논란’을 일으켜서 나 후보가 고전을 면치 못하게 했고, 'MB 내곡동 사저’에 처음 의혹을 제기하는 등 정치 편향적인 방송을 해왔다. 그리고 이에 열광하는 소위 ‘나꼼수빠’들을 창출해내며 그들의 열려한 지지를 받았다.
<환생경제>는 지금의 <나는 꼼수다>와 비교할 수 있다. 서로의 정치색을 지우고 ‘막말’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들이 제작한 두 프로그램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저 상대방 헐뜯기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의 ‘외도’ 쯤으로 분류해 놓고 싶다. 이러한 책임은 그들 스스로가 져야 마땅하지만 그전에 책임을 져야 할 매체도 분명히 존재한다.
언론이 항상 공정한 보도와 심판이 꾸준히 이루어졌다면 환생경제나 나는 꼼수다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 졌을까? 뿐만 아니라 김용민 이전에 <환생경제>와 관련된 정치인들은 김용민과 같은 처사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어느 언론은 이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도 않고 비난도 가하지 않았다. 언론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 보도로 언론의 제 기능을 다했다면 막말파문을 조장하는 이러한 사태까지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직장인 김영록(남.29)씨는 “먼저 <환생경제>와 <나는 꼼수다>를 과연 막말의 관점에서 동등하게 다뤘는가를 언론인에게 묻고 싶다. <나는 꼼수다> 김용민의 8년 전 막말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된 이유에는 선거철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확대 재생산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싸움이 지속되고 언론의 제 기능이 계속 마비된다면 <환생경제>와 <나는 꼼수다>는 시즌2의 제작으로 언론의 역할을 무시할 것이다. 무엇이 비판의 대상이고 진정 비판받을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론 스스로가 판단하길 거부하고 있다. 막말의 관점에서 <환생경제>와 <나는 꼼수다> 어느 쪽도 두둔하거나 지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참된 언론이라면 적어도 두 진영의 문제를 동등하게 다뤘어야 했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공정보도를 상실한 방송 3사와 메이저 신문사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를 외면하고 정권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참된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언론이 건강하게 제 기능을 했다면 <나는 꼼수다> 같은 팟캐스트의 등장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언론도 보도하지 않던 ‘1억 피부숍 논란’과 ‘MB내곡동 사저 의혹’은 <나는 꼼수다>를 통해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나는 꼼수다>가 다른 언론에 비해 취재력과 보도력이 뛰어나서 의혹을 제기하고 사실을 밝혀낸 것은 분명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정의’를 위해 기존의 언론사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파헤치고 고발한 것이다. 이렇게 밝혀진 ‘사실’을 평소 접하던 언론보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감을 느끼고 외면하는 이들에 대해서 언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정치색이 다른 진영에서 나왔다고 애써 무시하고 여전히 지지하는 그들에게는 대체 어떤 식으로 '정의’를 논해야 하는지 언론이 알고 있나 궁금하다. 보도를 안 한 건지 못한 건지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 두고 이에 대한 진지한 책임을 간구하고 싶다.
이번 막말파문으로 인해 <환생경제>와 <나는 꼼수다>의 막말을 비난하기에 앞서 언론의 현주소를 먼저 생각해보고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왜 정치인들이 언론의 역할까지 수행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정리와 반성 필요할 때
막말은 이제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것을 ‘막말’이라고 한정해서만 불러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막말’이란 콘텐츠로 웃음을 주고받으며 즐기고 있다.
막말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웃고 즐기다 여론이 몰아간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구잡이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 막말의 사전적 의미는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이라고 적혀 있다. 막말을 통해 우리가 웃고 즐기고 떠들거라면 ‘2. 김구라, 김용민 등의 방송인․정치인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던지는 말. 또는 그렇게 해서 좌중에게 웃음을 주는 말’ 이라고 하나 더 추가해도 좋을 법하다. 물론 막말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뒤에 여유를 두지 않고 잘라서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막말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막말은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잡담을 나눌 때도 술자리에서도 그들은 막말을 모방해서 속 깊고 진실한 대화 대신 말따먹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점차 대중들에게는 막말이 그 개념을 잊고 문화이자 콘텐츠로 ‘기형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 변신은 어느 정도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지속을 막고자 한다면 국민과 언론의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은 웃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며, 언론은 언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망각한 사실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다.
‘기형의 변신’이 우리 곁에 자리 잡아 가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그러한 무감각은 또 다른 실수를 동반하고 그 실수는 또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막말로 인해 웃고 즐기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여과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막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환생경제>는 예술이 되는 것이고 <나는 꼼수다>는 공정방송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공중파나 케이블을 통해 즐기는 수준의 막말에 제제를 가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사고와 노력으로 여과 장치의 기능을 하며 판단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리고 더 큰 바다의 역할을 하기 전에 수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고와 노력으로 여과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는 언론이 대신 여과 장치의 노릇을 해야 한다. 물론 언론은 평소 여과 장치의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다만 여과된 매체를 보면 여과의 과정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언론이 좋은 여과의 기능을 수행해야만 국민들도 올바른 여과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스스로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그로인해 비판받을 것이 있다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언론도 곧 국민이며 국민도 곧 언론이 될 수 있다. 작은 시작일지라도 그것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시작하고 나면 그 뒤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위대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위대한 시작의 신호탄을 울리는 국민과 언론의 길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기획/남윤실 기자 글/박성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