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의 희망과 염원 담긴 정치 활동
민중들의 희망과 염원 담긴 정치 활동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4.06 2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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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민중들의 희망과 염원 담긴 정치 활동

옳지 못한 대중선동가 구별하는 안목이 가장 시급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는 포퓰리즘의 긍정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이민성 기자 

민중의 견해나 바람을 대변하는 정치사상이나 활동을 의미하는 포퓰리즘은 대중에게 호소하여 다수를 위한 정책을 펼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유사한 동시에 일그러진 대중선동가를 낳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녔다. 이에 한국에서는 ‘대중주의’, ‘인민주의’, ‘민중주의’로 알려진 포퓰리즘의 이중성에 대해 알아봤다.



 

대중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독재자 

최근 미국,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포퓰리즘(Populism) 열풍이 불고 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와의 인터뷰에서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교황은 “당시 독일은 1930년 경제 위기를 겪고 붕괴된 상태였다. 독일인들은 국가를 다시 일으켜줄 지도자를 원했고, 이때 히틀러가 ‘내가 할 수 있다’고 외치며 나섰다”고 언급하며 “히틀러는 권력을 훔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민에 의해 선출됐고, 그 후 국민들을 파멸시켰다”고 강조했다. 


 1919년 9월 상부로부터 독일노동당의 회합을 사찰하라는 지시를 받은 히틀러는 회합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여 독일노동당원이 됐다. 나치당의 전신으로 알려진 독일노동당은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작은 정당이었으며, 히틀러가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맥주홀 폭동 재판’ 이후부터였다. 맥주홀 폭동 재판은 히틀러가 1923년 11월 8일 나치당 돌격대를 동원해 바이에른 주 정부의 수뇌부인 뮌헨에서 쿠데타에 실패한 사건으로, 재판장에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해 독일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1924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한 히틀러는 민심을 사로잡는 방향으로 정치 전략을 전환해 군중이 많은 곳에서 정부의 무능을 공격하는 선동 연설로 대중들을 포섭했고, 나치당은 1926년 11월 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당시 독일인들은 왜 히틀러의 나치정부에 협조하게 된 것일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연합국에게 배상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대외적으로 입지가 좁아졌고, 대내적으로는 경제 불황과 기근으로 농민들의 봉기가 자주 등장했다. 이와 같은 악재에 등장한 히틀러는 ‘범게르만 민족주의’로 독일인들의 결집력을 주장했고, 이에 많은 독일인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3년 3월 5일 총선에서 나치당이 43.9%의 지지율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성장했다. 이로 인해 평소 나치당을 반대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도 새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여 나치당의 득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겸한 총통에 올라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킨 뒤 독재자가 되었다. 후에 히틀러는 범게르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전례가 없는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독일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비극을 막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히틀러 지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가 총통이 된 이후에 독일인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무뎌지거나 침묵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시는 “나치는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결국, 다수의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정견에는 찬성했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회피해버린 것이다.

    

 

 

포퓰리즘의 본질 지키기 위한 대중들의 노력  

포퓰리즘으로 인해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했다고 하여 포퓰리즘을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등장한 촛불집회 역시 포퓰리즘의 일환인데, 해당 집회는 기존 권력의 부당함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됐다. 촛불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이는 촛불집회 주최 측이 해당 집회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거나 집회에 참여한 이들이 주변에 집회 참여를 독려하면서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중들 사이에 전파된 것이다.
 

  실제로 포퓰리즘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나로드니키(Narodniki)운동과 미국 인민당이 주도한 농민운동 등에서 비롯됐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로마시대 호민관인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 추진도 포퓰리즘 범주에 포함된다며, 꽤 오랫동안 인류사회에 포퓰리즘이 함께 공존했음을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포퓰리즘은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대변하고, 다수의 정치참여를 독려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민주적인 성격을 지녔다. 간혹 히틀러처럼 포퓰리즘을 악용하는 선동가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기도 했지만, 다수의 권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포퓰리즘의 본질만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이진모 한남대학교 교수는 “포퓰리즘 본질의 한계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포퓰리즘을 악용하는 선동가를 구분하는 안목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라고 언급했다.
 

  포퓰리즘은 다수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이나 대중선동가들이 포퓰리즘의 좋은 취지를 왜곡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극이었다. 전 세계에서 포퓰리즘이 이슈인 요즘 옳지 못한 선동가를 가려내는 안목이 대중들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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