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대열 싹쓸이, 한강 신드롬’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한국인 첫 노벨문학상 수상, K문학 새 역사 쓰다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새 역사를 썼다. 아시아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2012년 중국의 모옌 이후 12년 만이며, 특히 아시아 여성으로는 123년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은 지난 2000년 평화상을 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다.
121번째 노벨문학상 전당 입성한 한강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월 10일(현지시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하며 선정 이유를 전했다. 이어 한림원은 “한강은 자기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면서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부연했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한강은 한림원이 공개한 전화 인터뷰에서 “정말 정말 감사하다. 너무 놀랐고, 영광이다”며 “한국 독자들, 동료 작가들에게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노벨문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다. 1901년부터 현재까지 총 117회에 걸쳐 수여되어 총 121명의 수상자가 있었다. 역대 수상자들 중 프랑스가 16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미국 13명, 영국 12명, 스웨덴과 독일이 각각 8명이다. 공동 수상하는 경우가 드물어 1904년과 1917년, 1966년, 1974년 등 4차례가 전부였다. 최연소 수상자는 1907년 ‘정글북’의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으로 수상 당시 41세였고, 최고령 수상자는 2007년 87세로 영예를 안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하는 일도 두 차례 있었다. 1958년 ‘닥터 지바고’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처음엔 수상을 수락했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수상을 거부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 장 폴 사르트르도 1964년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지만 공식적인 상을 거부해왔기 때문에 그해 노벨상도 받지 않았다.
한편 문학가가 아닌 수상자도 있었다. 1953년 회고록 ‘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군인이자 정치가이면서도 문필가이기도 했다. 2016년에는 미국 포크록 가수이자 민권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밥 딜런이 수상자로 호명되어 전 세계가 술렁이게 했다. 노벨문학상 역사상 가수가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독창적 작품세계로 국제적 위상 높여와
한강은 1970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의 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를 비롯해 ‘새터말 사람들’, ‘동학제’, ‘멍텅구리배’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한승원이다. 이로 인해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강은 지천에 책이 널려 있던 집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그의 날카로운 글쓰기가 그때부터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로 올라온 한강은 풍문여고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잡지 ‘샘터’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을 발표했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후 ‘여수의 사랑’, ‘검은 사슴’, ‘내 여자의 열매’,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 다양한 장편 소설과 소설집을 발표했다.
한강은 죽음과 폭력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풀어내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장편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작별하지 않는다’ 등으로 한국 현대사의 깊은 어둠과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소설 외에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와 동화 ‘내 이름은 태양꽃’, ‘눈물상자’,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국내외 유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이상문학상과 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국제적으로는 2016년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세 작품을 묶은 소설집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에서 영연방 이외 지역 작가에게 주는 국제 부문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이외에도 2017년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 2018년 ‘채식주의자’로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을 받았으며, 지난해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로 메디치상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은 여기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면서 명실상부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들게 됐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100만 크로나(약 14억 3천만 원)와 메달, 증서가 수여된다.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
이제는 ‘K문학’, 글로벌 한강 신드롬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 서점가는 모처럼 특수를 누리고 있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작가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오픈런’과 ‘품절 대란’이 벌어졌고, 대형 서점 사이트에는 한강의 책을 구매하려는 이용자들이 몰려 접속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후 한강 작가의 책은 엿새 만에 누적 기준으로 100만 부 넘게 팔렸다. 작품 중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식주의자’는 노벨상 수상 이전까지 110만 부가 판매돼 이미 밀리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수상 이후 40만부가 발주됐다.
출판계에 따르면 2020년 이후 누적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책은 4종에 그친다. 2020년에 출간된 이미예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2021년 출간된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은 1권과 2권을 합쳐 100만 부를 넘겼다. 지난해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슬램덩크 더 퍼스트’의 열풍 속 ‘슬램덩크’ 단행본이 100만 부를 돌파한 바 있고, 올해 첫 밀리언셀러인 ‘세이노의 가르침’은 100만 권을 넘기기까지 1년 4개월이 걸렸다. 과거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100만 부를 넘기기까지 8개월이 걸리는 등 책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까지는 수개월에서 1년여 기간이 걸리는 게 일반적인데, 신간도 아닌 구간이 엿새 만에 100만부 넘게 팔리는 것은 전례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해외 서점가에도 ‘한강 돌풍’이 불고 있다. 미국 도서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한 아마존에선 ‘채식주의자’가 문학 1위, 종합 10위에 올랐고, 중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당당왕과 독일·프랑스 아마존 사이트에서도 채식주의자는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로 등극했다. 일본 도쿄 최대 규모의 기노쿠니야 서점 신주쿠 본점에는 ‘축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이라고 적힌 홍보 문구가 내걸린 특별 판매대가 마련됐다.
이처럼 한강 작가의 책 판매가 폭주하며 베스트셀러 대열을 싹쓸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 세계를 강타 중인 ‘K콘텐츠 열풍’이 문학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1917년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 이후 한국 문학은 100년 넘게 근대문학을 축적해 왔으나 여태껏 노벨문학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문학상이 발표되는 매년 10월만 되면 고은 시인과 항석영 작가, 김혜순 시인 등 여러 한국인 문인이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만, 수상은 쉽지 않았다.
인지도가 낮고, 번역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외에 불기 시작한 ‘K문학’ 열풍과 활발한 번역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작가들이 수상과 호평을 받으며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여오고 있었다. 여기에 한강을 비롯한 많은 문학인들이 꾸준히 노력한 끝에 결실을 맺었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수상을 통해 세계문학 속 한국이 더 이상 변방이 아닌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의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