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결말 맞이한 평화시위 이야기
다른 결말 맞이한 평화시위 이야기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3.08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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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다른 결말 맞이한 평화시위 이야기


시위, 민중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다


지난해 10월 29일, 1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그리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이에 대해 각계의 전문가들은 매 주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굳은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촛불집회가 등장하기 이전 과거에도 이 같은 평화시위가 등장한 바 있다. 1919년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제도에 분노하여 일본에 정면으로 맞선 3·1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닮은 듯 다른 3·1운동과 촛불집회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 공포했다. 이를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9년 후,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국내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이 대한제국 독립 운동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학생들은 그보다 이른 2시 30분 무렵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 다음날 시위는 주요도시들로 확산됐고,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서울로 모인 수많은 백성 중 다수가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3·1운동은 1919년 1월 21일 숨을 거둔 고종 황제의 암살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이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고종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앞서 1894년 조선정부는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즉, 그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3·1운동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미명하에 토지조사사업을 단행했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토지를 무자비하게 수탈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토지 절반 이상이 농민들의 것이었기에 그 피해가 막심했고, 눈뜨고 코 베인 격인 수탈이 계속되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3·1운동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이와 달리,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평범한 시민들이 주축을 이뤄 전국으로 확산됐다. 반면, 촛불집회는 평화시위가 폭력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데 최선을 다했다면, 3·1운동의 경우 초반엔 평화시위를 전개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가 점차 과격화되면서 폭력적인 시위로 변질됐다.
 

  3·1운동이 일제에게 저항한 시위였다면 촛불집회는 국정농단 주범과 재벌들에 대한 분노가 담긴 시위였기 때문에 두 시위 모두 지배층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했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 을사5적신 중 한 사람인 이완용은 <매일신보>에 ‘오호! 조선 동포여! 속담에 사중구생(死中求生)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조선 인민은 생중구사(生中求死)하려 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까닭인가?’라고 3·1운동에 대한 경고문을 실었다. 이 말인즉슨, ‘속담에 죽을 고비에서도 살 길을 찾는다고 했는데, 지금 조선 인민들은 충분히 살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헛되이 죽을 길을 찾아간다’며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어리석다고 비꼰 것이다. 촛불집회를 비하한 세력들도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과 야권 의원들을 ‘빨갱이’라 비난하며 촛불집회를 깎아내렸다.


 

유사한 시위 그러나 다른 결말


제5차 촛불집회 이후 박근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고, 이로 인해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으며, 특검팀을 별도로 꾸려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해왔다. 그와 달리 3·1운동의 결과는 처참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수많은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심한 고문으로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3·1운동을 통해 무단통치의 문제점을 깨달은 일제는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여 조선인에게도 승진의 기회를 열어줬다. 그로 인해 기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갈등이 친일 조선인과 그렇지 않은 조선인 간의 갈등으로 변질됐다. 즉, 일제의 식민지배가 3·1운동으로 인해 더욱 치밀하고 정교해진 셈이다. 그러나 3·1운동의 결말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3·1운동은 후일에 독립운동가 배출에 큰 영향을 줬다. 


  송현강 한남대학교 교수는 “독립운동가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3·1운동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강하나 박헌영 등이 그 당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다음 세대는 친일파가 가장 많았는데, 일제가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식민교육이 본격화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했다.
 

  비록 3·1운동과 이번 촛불집회가 발생배경과 주도세력 등이 다를지라도 기존의 지배층에 저항했다는 사실만은 동일하다. 특히, 두 시위 모두 그 당시 민중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민중들의 목소리가 담긴 두 시위를 통해 좀 더 민중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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