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낮은 이들의 아버지
세상 가장 낮은 이들의 아버지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7.03.0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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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세상 가장 낮은 이들의 아버지

 

한평생을 조국민 위해 바치다

 

 

2016년 11월, 광주광역시 남구 측은 한센인·결핵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데 일평생을 받친 오방(五放) 최흥종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양림동에 건립한다고 밝혔다. 기독교 목회자부터 독립운동가, 교육가, 한센인 구호사업가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최 선생의 삶을 조명했다. 




 

오방 최흥종 선생을 있게 한 여러 번의 터닝포인트


1880년 5월 4일 태어난 오방 최흥종 선생(1880~1966)은 전라남도 광주읍에 출신으로 아버지 최학신과 어머니 국씨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지만, 손위 형제가 요절했기 때문에 장남이나 다름없었다. 남도주먹 1세대로 인근 지역에서 악명을 떨쳤던 최 선생이 ‘광주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몇 차례의 인생 전환점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환점은 1904년 김윤수 집사와의 인연으로 비롯된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유진 벨은 목포와 광주 양림리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활동을 하던 중에 김 집사를 통해 최 선생을 알게 됐고, 오언 선교사와 같이 최 선생을 감화해 기독교에 입교하게 했다. 두 번째 전환점은 의병대장 백낙구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김 집사와 벨 선교사의 만류에 불구하고, 순검을 희망했던 최 선생은 끝내 1905년 광주 경무청 순검이 됐다. 그곳에서 그는 잡혀온 의병들을 관리하면서 여러 의병들을 만나게 됐고, 특히 의병대장 백낙구를 만나면서 자연스레 민족의식이 고취됐다. 최 선생은 의병들과 미리 내통해 관군의 기습에 대비케 했고, 심지어 감옥에 갇힌 의병들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결국, 1907년 3월 경무관 사도하라가 광주국채보상운동 본부에 걸린 ‘대동의무소’라는 간판을 떼어오라고 지시하자 그 길로 순검직을 그만뒀다.


  이후 최 선생은 포사이트 선교사의 영향으로 한동안 선도사 활동을 하며 신앙생활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1909년 선교생활을 청산하고 광주제중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이때, 포사이트 선교사가 그에게 큰 영감을 줬다. 그해 한여름, 포사이트 선교사는 자신이 타고 다니던 나귀에 한센인 환자를 태우고 자신은 나귀로 끌고 병원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은 한센인을 철저하게 배척해야 할 존재로만 여겼기 때문에 최 선생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그는 광주에서 한센인들과 같이 생활하기 시작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최 선생을 ‘한센인의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의 아버지


최흥종 선생은 1926년 한센인들을 집단 수용하여 치료하기 위해 여수에 애양원을 설립하는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당대 YMCA활동으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유명 인사들과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를 느낀 최 선생은 한센인 문제로 조선총독부와의 담판을 짓기 위해 150여 명의 한센인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에 이르렀다. 최 선생과 함께한 한센인들은 열하룻만에 서울에 당도했는데, 때마침 이 소식을 접한 한센인들도 가세하면서 서울에는 약 400여 명의 한센인들이 집결했다고 한다. 이 광경에 경악한 조선총독부는 최 선생의 청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총독부는 1916년 최초로 구라사업(救癩事業)의 일환으로 소록도 한센인 수용소를 건립했다. 그러나 해당 수용소는 100여 명만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15,000여 명의 전국 한센인을 수용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최 선생은 총독과 ‘조선나예방령’ 제정할 것을 담판 지었고, 이에 근거해 ‘나예방협회’도 조직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나주에 호혜원을 건립하여 한센인 구호사업에 힘썼다.

 

 

광주 좌파·우파를 이어준 연결고리   


최흥종 선생은 선교활동과 한센인 구호사업 이외에도 사회운동가로 유명한 인사다. 1917년 3월 2일, 서울남대문시위에 참여하여 명연설을 펼친 최 선생은 5일 체포돼 1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오히려 형무소가 여러 운동가들과의 만남의 장이 됐다. 이후 그는 1919년 3월 10일 광주 사회주의자 지도자인 서정희를 광주 시위현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때 최 선생은 우파였다. 광주 좌파와 우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실제로 1920년 8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에 1대 회장이 최흥종이었고, 2대 회장이 서정희였다. 뿐만 아니라 1925년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전국 신간회가 분열됐지만, 광주만은 좌파에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면 최 선생을 회장직으로 앉혔다. 또한, 대표적인 좌파조직 ‘노동연맹’의 전라지부 회장도 바로 그였다. 최 선생 스스로가 정치에 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러 회장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우파와 좌파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헤아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학계 전문가들은 최 선생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광주시 사회운동이 그들만의 강한 결집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사)오방기념사업회 최영관 이사장은 “최흥종 선생은 1966년 5월 14일 생을 마감했는데, 최 선생의 장례식은 이례적으로 광주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됐습니다. 이날 수많은 한센인, 걸인, 결핵환자 등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아버지 죽음에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최흥종 선생은 김구와 이승만 대통령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광주를 방문하면 반드시 찾아뵙던 광주시의 큰 어른이었다. 그런 유명인사임에도 최 선생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그야말로 이 시대가 진정으로 바라는 위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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