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따뜻한 울림 전하는 진정한 나눔의 실현
[이슈메이커=김남근 기자]
헤어디자인 문화의 흐름 주도하는 선한 영향력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미 2,500여 년 전 공자(公子) 역시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知之者不如好之者),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好之者不如樂之者)”라고 말한 바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국 노력함을 즐기는 이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천재도, 그 재능을 즐기는 사람도 노력 없이는 최고가 되기 힘든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헤어디자이너 ‘하능’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수함은 없었지만, 노력과 열정, 그리고 긍정의 힘과 종교적 신념으로 한 분야의 정점에 가까이 다가선 이가 있다. 달란트가 부족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 인정받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증명해 보임에 희열을 느꼈고, 항상 자신보다 주변을 배려하는 자세로 타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도전에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며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나갔고, 현재도, 앞으로도 자신의 도전은 멈추지 않으리라 확언한다. 가위질로 만들어진 손가락 위의 굳은살을 훈장처럼 여기며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전하고 있는 헤어디자이너 하능(최하능)과의 가슴 따뜻한 인터뷰를 이슈메이커에 기록해 보았다.
UDT 출신 헤어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는데요. 미용업계로의 입문 계기가 궁금합니다.
“반갑습니다. 청담에서 헤어살롱 하움(HAUM)을 이끌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 하능입니다. 제가 미용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저는 체대 입시를 준비하던 중 환경적인 이유로 입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직업군인을 선택했고, 당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지고 강한 부대였던 UDT(해군 특수전전단)에 지원해 약 4년 반가량 부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군대 4년 반이라는 시간을 남성들만 있는 집단에서 생활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여성들이 있는 집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미용업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저의 삶과 현재의 호기심에 대한 접점을 찾아보니 미용업에서 교집합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제 머리를 직접 커트해 보기도 했을 정도로 관심이 있는 분야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시 UDT 동료들에게 전역 후의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계획을 말했는데,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진심 어린 응원도 있었지만, ‘네가 어떻게 미용을 해?’, ‘넌 못해’ 등과 같은 말도 들었고, 그 말을 듣고는 ‘두고 보자’라는 오기와 함께 의지와 확신이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웃음) 그 길로 미용학원을 등록했고, 첫 시험에서 당당히 자격증을 따내며 본격적으로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어요”
직접 자신의 머리를 커트했을 정도면 재능이 출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스스로 제 머리를 커트한 이유는 미용실에 갈 형편이 안 됐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께서 개척교회 목회자의 길을 걸으시며 자신보다는 어려운 이들을 먼저 배려하셨고, 가족들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본받으며 주변을 먼저 둘러보는 자세를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을 위한 최소한만을 영위하며 살아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저는 피자집, 주유소, 호프집, 헬스장 등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게 됐습니다. 이렇듯 생활이 녹록지 않다 보니 간단한 커트도 직접 하게 된 것이었어요”
부사관으로의 UDT 입대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비록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남부럽지 않은 화목한 집이었기에, 저는 이 행복을 더 오래도록 지켜나가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행복을 지키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은 ‘경제활동’이었어요. 그리고 당시의 제 나이에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직장은 군대였죠. 그래서 UDT와의 인연이 시작되게 되었고, 당시 저의 선택으로 인한 경험은 지금껏 제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전역 후 너무나 파격적인 커리어 전환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후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자격증 취득 후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경남 마산에 있는 ‘공영길 헤어숍’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달가량 일을 했었는데, 당시 들었던 생각은 ‘서울로 가야 한다’라는 것이었어요. 남들보다 시작이 조금 늦은 편이었기에 보다 큰 시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승산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무작정 짐을 싸 서울로 올라갔고, 너무나 운이 좋게 차홍아르더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차홍 원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가장 핫한 헤어숍에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입사와 함께 ‘10년 내 창업’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죠. 막내 스태프로 시작해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햇수로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디자이너가 된 후에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죠. 이미 업계에서 인정받는 선배 디자이너분들이 즐비했고, 그 속에서 저만의 경쟁력을 찾아야 했습니다. 남들보다 적어도 2시간 먼저 출근했고, 2시간 늦게 퇴근했습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으로 연습에 매진했어요. 이와 함께 인스타그램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평균 3개의 피드를 지속해서 업로드 했고, 저 자신에게 집중하는 피드보다는 고객들의 헤어에 집중한 시술 비포&애프터 콘텐츠에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었죠. 이에 대해 주변에서는 방식의 전환 등 많은 조언을 해주셨지만, 저는 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저를 유일하게 응원해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고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응원군이 누구였나요?
“차홍아르더의 차홍 원장님이셨습니다. 첫 만남부터 저에게 많은 용기와 영감을 주신 은인 같은 분이시죠. 차 원장님의 적극적인 응원이 있었기에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고, 새로운 시도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7년 차 정도가 되었을 때 제 인스타그램 콘텐츠의 포텐셜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팔로우 수가 빠르게 늘어났고, 이와 함께 예약이 물밀듯이 들어왔어요. 처음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목표로 삼았던 선배 디자이너님들보다 매출 우위를 점하게 됐고, 하루하루가 정말 버라이어티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요닝을 거쳐 비로소 제가 꿈꿨던 ‘창업’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게 됐습니다”
부(富)의 상징인 청담에 자리를 잡으셨는데요. 과정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움(HAUM)의 오픈을 준비했던 시간은 변화무쌍한 태풍과도 같은 시기였습니다. 오픈 2주를 앞두고 인테리어업자와 연락이 두절됐고, 이미 예약은 1개월 치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어요. 자본도 모두 소진한 상태였기에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저와 직원들이 직접 나머지 인테리어 작업을 진행해야 했죠. 양해를 구했고 할인 프로모션을 하며 1주일 매출을 모아 공사 일부를 진행하고, 또 다음 1주일 매출을 모아 또 다른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4개월이라는 시간에 걸쳐 인테리어를 마칠 수 있게 되었어요. 물론 현재는 2차례에 걸친 리모델링을 통해 고객분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숍으로 거듭난 상태입니다”
성장을 거듭하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하움의 모든 가족들이 열심히 해주셔서 외형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로서 저는 저를 믿고 찾아주시는 고객들과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단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마땅한 취미도 없습니다. 고객들과 만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매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경영자로서 시간을 거듭하며 저의 그릇된 판단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실수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어요. 힘들었지만 이 과정은 저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게 된 시간이었고, 지금도 그 의미와 본질을 배워나가는 중입니다”
헤어숍 디자이너이자 경영자, 강사, 인플루언서이자 크리에이터 등 다방면에서의 도전을 거듭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스스로 저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더 많은 고객들과 더 많아질 직원들을 위해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서비스, 그리고 최상의 처우와 최상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제가 첫 번째로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가 더 많이 뛰면서도 본분을 잊지 않는 뚝심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헤어디자이너로서 받은 달란트가 최대한 많은 곳에 활용될 수 있도록 쉼 없이 도전을 거듭하는 것이고, 이 도전으로 얻게 되는 소중한 결실들은 제 주변의 모든 이들과 아낌없이 나누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키워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뿌린 만큼 거두고, 베푼 만큼 얻게 된다고 강하게 믿고 있죠. 그렇기에 그동안 지속해 온 선교와 봉사, 기부활동을 이어 나갈 것이며, 경제의 흐름보다는 문화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헤어디자이너로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 올해 예정된 업장 확장과 대기업과의 콜라보, 일본 진출 등 넘어야 할 과제가 산재하지만, 하움 가족들과 힘을 합친다면 특별한 어려움 없이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에게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백발이 된 미래의 제가 백발이 된 고객의 머리를 손질하며 미소 섞인 과거를 복기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멋진 디자이너보다, 멋지게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모여 있는 하움(HAUM)에 많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